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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과 희생된 65家 혼백 위로한 ‘대평서당’우리마을탐방[184] 순흥면 석교1리 ‘서당마·동호마’
  • 이원식 기자
  • 승인 2018.01.25 11:29
  • 호수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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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류씨 서당 설립, 곡식 모아 희생자 추모
통일신라 석불입상, 보물116호 마을 앞산에

석교1리 전경
노인회관 건립 기념비
노인회관

순흥면 서당마을 가는 길
순흥면사무소에서 순흥초등학교 앞을 지나 동촌방향으로 200m 가량 내려가면 도로 우측에 500년 수령 고목 느티나무가 있다. 이 느티나무 맞은편으로 난 길을 따라 100여m 쯤 가면 석교1리 마을회관이 나타난다. 여기가 옛 대평서당이 있던 서당마이다. 지난 13일 서당마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류명희 이장, 김준기 노인회장, 박종수 노인회 사무국장, 강영희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대평서당의 내력과 석불입상 이야기를 듣고 왔다.

석교리 석불입상

역사 속의 석교리
순흥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고을의 이름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읍내리고분벽화가 조성될 당시(500년경)는 고구려의 땅으로 급벌산군이라 불렀고, 석교리석불입상이 만들어질 때(700년대, 통일신라)는 급산군이 됐다. 고려 초에 흥주라 불렀고, 안향(1243-1306)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흥령현이라 불렀다. 고려말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의 태를 이곳에 묻은 보상(報償)으로 1348년 순흥부로 승격했다. 3왕의 태를 여기 묻은 것은 안향 선생의 영향으로 보여 진다.

조선 초 태종 임금(1413)이 전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부를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조선 중기(1600-1700년) 무렵 부(府)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부의 소재지 지역을 대평면(大平面)이라 하고, 아신리(衙薪里,관아), 성하리(순흥초), 사현정리, 위야곡리(사현정뒤), 석교리(石橋里), 죽동리, 묵동리(거묵골), 태장리, 한산동리(상태장) 등을 두었다.

이 때 동호, 서당촌, 돌다리 지역을 묶어 석교리라 칭했다. 조선 말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대평면 석교리가 동호리(東湖里), 당촌리(堂村里), 후촌리(后村里,돌다리上), 하촌리(下村里, 돌다리下)로 분리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순흥군, 풍기군, 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고, 동호리, 당촌리, 후촌리, 하촌리가 다시 석교리로 통합되어 순흥면에 편입됐다.

류명희 이장은 “석교리는 일제 때 동호가 1리, 서당촌이 2리, 돌다리가 3리로 편성되었다가 1980년대 이후 농촌인구 감소로 동호(35호)와 당촌(30호)을 1리로 통합하고 돌다리를 2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동호교

지명유래
석교1리는 예전에 있었다는 돌다리(石橋) 동쪽에 동호마을이 있고, 서쪽에 서당마가 있다. 동호마을은 죽계(竹溪)가 흘러 내려오다가 돌다리 근처에 이르러 큰 호(湖)를 이루었는데 이 호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다하여 동호(東湖)라고 이름지었다. 서당마을은 이곳에 사는 권씨, 유씨가 서당을 짓고 훌륭한 선생을 모셔와 자녀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서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당마 또는 당촌(堂村)이라 불렀다.

김지락(80) 어르신은 “마을 회관 바로 앞 석화촌 자리가 예전에 대평서당이 있던 자리”라며 “일제 초기까지 학동들이 한학을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대평서당터
대평서당기

아! 정축년, 그리고 대평서당

마을 탐방 중 서당마을은 ‘대평서당’에서 유래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집에 와서 대평서당을 찾아봤다. ‘순흥면 석교리에 권씨, 류씨 등 마을 사람들이 창건한 서당’이라고 나와 있다. 백방 수소문 끝에 석교2리 권용학(權容學,83,금성단성역화추진위원장) 순흥향교 전 전교님께서 ‘대평서당기’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튿날(18일) 선생의 자택으로 가서 서당기를 펴놓고 내력 설명을 들었다. 이 서당기는 퇴계의 9대손 이야순(李野淳,1755-1831)이 1822년 대평서당에 와서 정축년에 희생된 혼백을 위로하는 제사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대평서당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 정축년 변란에 금성대군과 이보흠부사 그리고 죽계 일대 65家가 죽임을 당하니 천고에 짝이 없는 일로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죽계 곁에 대평서당이 있는데 그 일이 있었던 날의 옛 마을이다. 권씨와 류씨가 서로 더불어 살면서 슬퍼 탄식하면서 의논하여 그들을 위해 각각 곡식을 약간 내어서 초하룻날 제수를 준비하여 65家의 혼백을 서당마루에서 위로하니 진실로 어진 군자의 마음 씀이니라」고 적었다.

석교리 느티나무

정축지변 65家 영혼 위로
대평서당은 당시 순흥부 대평면 소재지에 있는 사립교육기관이었다. 이 서당은 석교리에 살고 있던 안동권씨와 전주류씨가 주가 되어 설립했다. 안동권씨 석교 입향은 단종조 충절인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 1403-1456)의 손자 권순(權純)이 1510년경 예천 용궁에서 순흥으로 이거하여 석교리에 뿌리내렸다. 한편 석교리의 전주류씨는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류영경(柳永慶,1550-1608)의 2자 류흔(柳欣,호조좌랑)의 후손이다. 류흔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부인이 손자를 데리고 1600년대 초 순흥 태장에서 석교리로 이거하여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권용학 전교

권용학의 금성단성역화 기본방향에 보면 “대평서당은 석교리에 세거하던 죽림 권산해의 후손과 전주류씨 문중이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 65家의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고자 설립했다. 이후 금성단 관리와 제향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적었다. 류명희 이장은 “대평서당은 일제 초까지 강학과 제향이 이루어 졌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허물어진 것을 저의 선친(1916년生)께서 17살 때(1934년) 철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 마을 류준희(69,소수서원도감) 씨는 “일제(日帝) 초 대평서당에서 65家 제사를 지내는 날, 일제 앞잡이 면장이 와서 참례하려 하자 마을 사람들이 방에서 끌어내 쫓아버렸다는 이야기를 선친으로부터 들었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제향이 없어지고 서당도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서당마 사람들은 “대평서당기는 정축지변이 일어난지 365년이 지난 후의 기록이지만 당시 순흥 사람들의 인심이 어떠했는지 짐작 된다”면서 “대평서당의 설립은 1600년대 후반(순흥부 회복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대평서당의 추모의식은 나중에 두레골 서낭제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석불입상 전각

승림사지와 석불입상
순흥 석교1리에 보물 제116호(1962) 석불입상이 있다. 김준기(75) 노인회장과 승림사지(僧林寺址)에 올랐다. 김 회장은 “통일신라 때 창건된 절이라는 구전만 전해올 뿐 자세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학교 운동장만한 복숭아밭 안 쪽 산기슭에 석불입상 비각만 우뚝 서 있다. 사람 키보다 큰 2m 높이의 석불은 왼팔을 잃은 상태에 온몸에 무수한 상처를 입고도 복스러움과 은은한 미소는 잃지 않은 듯하다.

우상철 씨

현장에서 만난 우상철(66) 씨는 “발굴당시 불두는 떨어져 있었고, 무릎아래는 땅에 묻혀있었다”며 “주변에 석불좌상 등 문화재급 유물이 많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 가지고 가고, 무거워서 못 가지고 간 석불입상만 남았다. 요즘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서당마.동호마 마을 사람들>

류명희 이장
김준기 노인회장
박종수 노인회사무국장
강영희 할머니
전혜란 할머니
김지락 어르신
김옥자 할머니
권연옥 할머니
강우진 씨
전병국 서당마반장

석교1리 사람들
석교리는 속칭 ‘서당마’라고 부른다. 선비의 고장에 썩 잘 어울리는 마을이름이다. 석교1리 사람들은 옛 대평서당이 있던 자리에 2001년 마을 회관을 설립하고 선조들이 남긴 미풍양속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자가 회관에 갔을 때 마을 사람들 20여명이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박종수 노인회 사무국장은 “우리 회관은 늘 북적이고 왁자지껄하다”며 “이게 바로 인심 좋고 화목한 마을의 증표”라고 말했다. 강영희(82) 할머니는 “우리마을은 서당의 영향을 받아 그런지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하고 훌륭한 인물도 많이 태어났다”며 “옛 대평서당은 없어졌으나 순흥초등과 소수중학교가 인근에 세워져 명실상부한 서당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전혜란(82) 할머니는 “지금 동호교 자리에 예전에는 외나무다리가 있었다”며 “가마타고 시집 오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60년 세월이 잠깐 지나갔다. 60년 전 오늘과 같은 세상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고 말했다. 김옥자(80) 할머니는 “예전에 두레박으로 물 길러 먹고 냇가에서 빨래하던 일을 생각하면 너무도 많이 변했다”며 “예전으로 치면 지금은 신선놀음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권연옥(80) 할머니는 “마을의 자랑은 500년 수령 느티나무와 석불입상 보물이 있는 것이요. 류명희 이장님과 김준기 노인회장님 같은 휼륭한 지도자가 있는 것”이라며 마을을 자랑했다.

석교리 복숭아

전병국(63) 서당마을반장은 “석교1리는 복숭아 역사 30년을 자랑하는 복숭아마을”이라며 “Y자형 수형에 친환경 재배법으로 소비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최고의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귀촌한 강우진(69) 씨는 “석교1리는 살기 좋은 마을로 소문이 나서 전국 각지에서 귀농·귀촌하는 사람이 많다”며 “제 친구 2명이 귀촌 준비를 마치고 곧 이사 온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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