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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물이 유난히도 희게 보여 ‘백수동(白水洞)’우리마을탐방[183]풍기읍 백신2리 ‘백수’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01.18 11:48
  • 호수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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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경주김씨가 터 잡은 우이동(牛耳洞)
해발 400-500m, 달고 상큼한 맛 사과 생산지

백수마을 전경
우이실 전경

풍기읍 백수동 가는 길
봉현면 남원사거리에서 죽령로를 따라 3.5km 가량 올라가면 백수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우측으로 내리면 백신2동 ‘바깥마’이고, 중앙선 굴다리를 통과하면 ‘우이실’이다. 오르막길을 따라 500m가량 더 올라가면 백신2리의 중심마을 ‘백수동’이다. 지난 6일 백수동에 갔다.
이날 마을경로당에서 김병용 이장, 홍영관 노인회장, 서영길 총무, 김래식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옛 빨래터

백수동의 역사
백신리 지역은 조선 초 태종 임금 때(1413년) 순흥도호부 창락면(昌樂面)에 속해 있었다. 당시 창락면이 풍기군을 뛰어넘어 순흥도호부에 속한 것은 풍기군수보다 품계가 높은 순흥도호부사가 창락역과 죽령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1457년(세조3년) 금성대군 거사 실패로 풍기군에 속했다가 1683년(숙종9년) 순흥부로 회복됐다.

조선 말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순흥부에 속해 있던 창락면이 풍기군으로 이관됐다. 이 때 창락면 백수동(白水洞)이 정식 행정구역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 할 때 풍기군, 순흥군, 영천군을 영주군으로 통합하고, 풍기군 창락면을 영주군 풍기면에 편입시켰다.

이 때 백수동과 신기동이 통합됐는데, 백수동의 백(白)자와 신기동의 신(新)자를 조합하여 ‘백신동’이라 이름 지었다. 통합된 백신동은 일제 때 1,2리로 분리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병용(60) 이장은 “백신2리는 웃마을(백수동), 아랫마을(우이실), 바깥마을(굴밖)로 구분한다”며 “예전에는 80여 세대에 400명 이상 살았으나, 지금은 48세대에 104명이 살고 있다. 고령의 어르신들이 많은 편이고, 대부분(100%) 사과를 주 농업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명유래
백신2리의 중심마을인 백수동은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오순도순 살아가는 정(情)의 마을이다. 마을 뒤 당골로 계속 올라가면 왼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장구봉’이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봉을 ‘매봉’또는 ‘매봉산’이라 부른다. 두 봉우리 사이로 난 계곡에는 드넓은 바위들이 많다. 이 바위 위를 덮쳐 흐르는 물줄기가 몹시도 희게 보여 옛 사람들은 ‘흰물내기’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이 마을 선비들이 흰 백(白)자에 물 수(수)자를 써 백수동(白水洞)이라 이름지었다. ‘흰물내기’의 ‘내기’는 ‘내(川)’를 뜻하는 말로 순수한 우리말이다.(예, 냉걸내기 등)

굴다리 안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우이실’이라 한다.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이 소의 귀를 닮았다 하여 우이실(牛耳室)이라 부른다. 또 백수동 뒤쪽 마을을 ‘작두막골’이라 하는데 주변 형세가 작두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라고 한다. 우이실 앞들을 ‘마우(馬牛)들’이라 부른다. (조선 때) 창락역이 있을 당시 마장(馬場)이 있던 자리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우이실의 전설
황소 귀를 닮았다는 우이실(牛耳室)은 경주김씨 200년 세거지다. 우이실의 경주김씨는 계림군(鷄林君)파로 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조선의 개국공신 계림군 제숙공(齊肅公) 김균(金균, 48세손)을 중시조(1세)로 삼는 종파다. 우이실에서 7대 째 살고 있는 김래식(82) 어르신은 “저의 5대조 영국(永國,1804-미상) 할아버지께서 안동 서후에 사시다가 십승지를 찾아 이곳에 와서 다래덤불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하셨다”며 “영국 선조께서 장성하여 이곳에 오셨다면 1830년경으로 추정된다. 또 영국 선조의 아들 응집(應集, 1830-미상) 선조는 600석 부자로 명성이 높았으며, 진사 벼슬에 올랐다”고 말했다.

우이실 김주식(69) 씨는 “우이실 경주김가는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지만 해방(1945년) 전까지 1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면서 “산업화 이후 모두 도시로 떠나고 지금은 3가구만 남았다. 현재 전국 각지에 후손 150여세대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백수마을의 형성
백신리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 경주김씨 일족이 우이실에 정착한 것이 처음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작두막골에 마을이 생기고, 이어서 1850년을 전후하여 백수마을에도 사람들이 한 집 두 집 모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 된다.

홍영관(77) 노인회장은 “저의 경우 조부님께서 이곳에 오셨으니 백수마을에 정착하신지 100년이 넘었다”면서 “지금 여기 사시는 분이나 미리 사셨던 선대 어르신들 이야기로는 우이실이 제일 먼저 생기고 난 다음에 작두막골이 생겼고, 이어서 백수동이 생겼다고 들었다. 그래서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50년경부터 마을 형성이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작두막골

작두막골 이야기
백수동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500여m 올라가면 작두막골이 나온다. 마을은 사라지고 옛 사람들이 살던 집터의 흔적만 남아있다.

예전에 이곳에 살았다는 임영택(88) 어르신은 “이곳은 화전민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라며 “1850년경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산속으로 숨어든 사람들이 초가삼간 토담집을 짓고, 원시적인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선친으로부터 들었다. 예전에는 12가구가 살다가 6가구가 남았는데 6.25 전 빨갱이들의 출현이 빈번해지자 마지막 남은 6가구도 백수동으로 소개되어 마을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김유순인천 계양구의회 의장

당도높은 백수사과
백수동 사과밭은 마을회관 주변 해발 350m에서 매봉산 중턱 500m 지점까지 위치해 있다. 김병용 이장은 “해발이 높고 일조량이 풍부하여 영주사과 중 가장 당도 높고 육질이 단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이 마을 출신 김유순(인천 계양구의회) 의장의 소개로 계양구민들의 사과따기체험이 해마다 이어지고 있다”고도 했다.

김창섭(65,사과발전연구회) 씨는 “백수동 사과의 시작은 ‘1960년대 초부터’라고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번성하여, 본격적인 생산과 수익을 올리게 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라며 “현재 마을에서 1만평 이상 대농을 하는 농가도 3집이나 된다”고 말했다.

은장도 명인 김희동
백신2동의 중심마을인 우이실에 김희동(金喜童) 일명 성근(成根)이라는 은장도 장인(匠人)이 살았다. 그는 1978년 관광민예품경진대회에 입상하여 한국은장도명인에 이름을 올렸다.

서영길 노인회총무는 “은장도(銀粧刀)란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죽음과 바꿀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이 한복 속에 간직하던 순결의 상징”이라며 “은장도 대장간이 마을 앞 국도변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 포장공사로 흔적이 없어졌다. 대를 이어온 은장도 대장간은 1896년 창락역(찰방역)이 폐쇄될 때까지 ‘말발굽의 징’ 등 철물을 창락역에 납품했을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백수마을 사람들
김병용 이장
홍영관 노인회장
서영길 노인회총무
임옥순 할머니
임영택 어르신
박상희 할머니
김래신 어르신
이동우 전 노인회장
김주식 씨
김창섭 씨


백수마을 사람들
2009년 준공된 마을회관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다. 기자는 마을회관에서 백수동의 100년사를 들었다.

45세(1975)부터 59세(1989)까지 14년동안 동장직을 수행했다는 임영택 어르신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도로변에서 마을까지 슬레트를 지게로 져 올렸다”며 “당시는 길이 지게길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홍영관 노인회장은 “추수할 때 마우들에서 마을까지 지게로 하루 여섯 짐 지고나면 해가 저물었다”고 말했다.

이분년 할머니

이동우(81)·이분년(82) 부부는 40여 년 전 살기 좋은 곳을 찾아다니다 이곳으로 오게 됐다면서 “강원도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왔는데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게 첫째 이유”라며 “백수동은 인심 좋은 마을로, 마을사람들 모두가 한 가족처럼 지낸다”고 말했다. 이산면 용암대에 살다가 백수동으로 시집왔다는 임옥순(90) 할머니는 “당시 우이실에는 초가집 10여 채 있었다”며 “이곳에 와보니 일꾼 두고 농사를 짓는 부잣집이 여러 집 있었으며, 보릿고개 때도 쌀밥 먹고 사는 부자마을 이었다”고 말했다.

동부동 소전거리에서 태어나 19살 때 가마타고 백수동으로 시집왔다는 박상희(88) 할머니는 “새댁시절 하루종일 샘물 여다 먹는 게 큰 일 이었다”며 “마을 동편 계곡물에서 빨래를 하고, 김장 배추를 절이고 씻을 때도 계곡에서 했다”고 말했다.

박순자 할머니

박순자(81) 할머니는 “인심 좋고 화목한 마을이 된 것은 이장님과 노인회장님께서 마을을 잘 이끌어 주신 덕분”이라며 “김병용 이장님과 홍영관 노인회장님의 봉사와 노력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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