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81] 상망동 진우마을

400년 전 안섭과 김진의 우정을 본받아 
우애(友愛)와 화합(化合)의 마을 만들어

 

진우(안마)마을 전경

상망동 진우 가는 길
봉화통로 상망교차로에서 좌측길 영광고·부석방향으로 간다. 영광고-웃보름골을 지나 마근대미재를 넘으면 대형 축사들이 보이고, 1km 가량 내려가서 우측(동쪽) 농로로 300m가량 들어가면 소쿠리형 산자락에 아늑한 마을이 진우(본마)마을이다. 지난 23일 진우에 갔다. 이날 진우경로당에서 권오근 통장, 최교욱 노인회장, 김필여 부녀회장, 박상걸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진우 느티나무(400년)

행정구역 변천과 ‘진우’
우리가 사는 영주는 고구려의 날이군(捺已郡), 통일신라 때 나령군(奈靈郡), 고려의 강주(剛州) 등으로 불러 오다가 조선조 태종 13년(1413년)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조선 중기(1600-1700)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영천군 망궐리(望闕里) 조와방(助臥坊)이라 부르다가 180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망궐면 조와리가 됐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으나 망궐면 조와동은 변동없이 현상 유지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조와동이 됐다가 1940년 영주읍 조와동, 1980년 영주시로 승격하면서 행정동인 상망동(5통)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지향의 향토지에 보면 ‘영천군 망궐면 지누우(助臥)’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진우가 조와동의 중심마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거리마(3반)

지명유래
조와(助臥)란 진우마을 뒷산의 형상이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진우 마을은 「400여 년 전 이 마을을 개척한 안섭(安燮)이라는 선비와 그의 친구 김진(金眞)이라는 풍수 사이의 우정이 깊어 참 진(眞)자에 벗 우(友)자를 써 진우(眞友)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거리마는 진우 서쪽에 있는 마을로 길거리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거리마’라고 부른다.

대마산 방향으로 길게 자리 잡은 양지마는 하루종일 해가 잘 비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오룡골(五龍谷)은 안섭 선비와 김진 풍수가 뒷산을 파다가 용두(龍頭) 다섯 개를 발견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권오근(62) 통장은 “법정동인 조와동은 웃귀내 삼거리에서 조와천을 따라 갓골, 진우, 오룡골, 양지마, 오상삼거리, 대마산 아래까지”라며 “상망동(5통)에 속한 진우마을은 안마, 거리마, 오룡골, 양지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100여 세대에 200여명이 살고 있는 화합과 우정의 마을”이라고 말했다.    

오룡골 풍광

관포지교 우정의 마을
진우마을은 안섭(安燮)과 김진(金眞)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마을이름을 ‘진우’라 했다고 한다. 
안섭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였고, 김진은 유명한 풍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일찍 곤궁할 때 안섭과 김진이 농사를 지었는데 곡식을 나눌 때마다 안섭이 김진에게 몫을 더 많이 주었다. 그것은 김진의 가난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안섭이 벼슬에 나아가지 못했지만 김진은 그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안섭이 ‘시운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며 위로했다」라는 등 우정이 굳고 깊었다.  
이를 지켜 본 마을 사람들은 안섭의 현명함과 김진의 사람 보는 능력을 칭찬하면서 두 사람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을 진우(眞友)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원로 김동일(83) 전 노인회장은 “안섭과 김진의 우정이야말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우정에 버금간다”며 “그 후에도 전설은 계속되어 금씨노인과 안씨노인의 우정이 전해지기도 한다”고 했다. 또 “진우(眞友)의 참뜻은 스스로를 낮추고 벗을 존경하는데 있다”면서 “예전에 영주군일 때 진우(眞友)를 진우(眞愚)로 표기할 때도 있었는데, 어리석을 우(愚)자의 참뜻은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므로 진우(眞愚) 또한 좋은 이름”이라고 말했다.

戈峴(마근대미재)

과현(戈峴,마근대미)의 전설
보름골로 넘어가는 재를 ‘마근대미’ 또는 ‘막은댕이’라고 부른다. 우리 옛말에 ‘대이’나 ‘댕이’는 골(谷)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마근대미’는 ‘막힌골’ 또는 “막장골”이란 뜻이다.

이 마을 이한목(70) 씨는 “마근대미 고개는 6.25 전 국군과 빨갱이들 간에 접전이 잦았던 곳”이라며 “옛날 삼국시대 때 삼국이 영주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격전을 벌렸던 군사요충지”라고 말했다. 삼국사기에 「炤知麻立干 十一年秋九月 高句麗襲北邊至戈峴 冬十月陷狐山城」이란 기록이 있다. 이는 「소지왕 11년(489) 가을 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마근대미재)에 이르고, 겨울 10월 호산성(狐山城.영덕)을 함락했다」라는 내용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할 때 마구령(부석)을 넘어 이곳(과현)에 이르러 신라군사와 치열한 접전을 벌렸다’고 하는 곳이 바로 ‘과현’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과현(戈峴)은 ‘마근대미재’이고, 과현 아랫마을은 망을 보는 곳이라 하여 지금도 망동(望洞,상망·하망)이라 부른다. 또 군사들의 주둔지인 술골(戌谷,철탄산 남쪽기슭)이라하고, 말을 조련하던 곳을 대마산, 성이 있던 성(城)재 등 옛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우애와 화합의 마을

선진 축산마을 ‘진우’
진우마을에 가면 현대식 대형축사들이 즐비한 것으로 봐 축산이 번성한 마을로 보여 진다.

최교욱(79) 노인회장은 “우리마을은 영주에서 세 번째로 큰 축산마을”이라며 “98세대 중 40세대가 축산에 종사하고 있으며, 총 2천 9백두를 사육하고 있는 축산 선진마을“이라고 말했다.

박상걸(58,축산전문인) 새마을지도자는 “진우의 축산 시작은 1985년경부터”라며 “현대의 축산업은 ‘축사 안에 포크레인이 들어가 작업할 수 있는 현대화 시설’, ‘유전자 추적을 통해 고능력우(高能力牛) 사양관리’, ‘축산 ICT 활용으로 생산비 절감 및 소득의 극대화’ 등을 연구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오룡골 이옥춘(84) 할머니는 “예전에 보릿고개를 넘으며 가난하게 살았으나 젊은 사람들이 머리를 잘 써 축산(소)을 시작하면서부터 부자는 아니지만 잘 사는 마을이 됐다”며 “오늘이 있기까지 우애를 바탕으로 마을을 잘 이끌어 주신 선대(先代) 또 지금 유능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우마을 사람들
권오근 통장
최교욱 노인회장
김필여 부녀회장
박상걸 새마을지도자
김동일 전 노인회장
오차임 할머니
이한목 씨
최선여 노인회총무
이정희 씨(4반장)
안순임 씨(2반장)


진우마을 사람들
기자는 마을회관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회관의 규모가 커서이기도 하고, 33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방에 가득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차임(84) 할머니는 “영주시민신문이 오면 ‘마을탐방’부터 읽는다”며 “다른 마을의 유래를 읽으면서 ‘우리마을은 언제 오려나?’ 기다렸다”고 말했다.

강춘자(76) 할머니는 “진우마을은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모여 음식을 함께하면서 정나누기를 한다”며 “김필여 부녀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의 수고가 참 많다”고 했다.

최선여(70) 노인회총무는 “우리마을은 부녀회도 잘 되고, 노인회도 잘 되고, 청년회도 잘 된다”며 “오늘도 권오근 통장님이 가지고 온 돼지고기를 부녀회원들이 요리를 잘 해 모두 잘 먹었다”고 말했다.

김필여(59) 부녀회장은 “진우(眞友)는 글자 그대로 우정이 두터운 마을”이라며 “부녀회원 45명, 노인회원 61명, 청년회원 42명 등 단합이 잘 되는 마을이다. 해마다 음력 초하룻날은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경로잔치와 화합의 대축제를 연다”고 말했다.

오후 3시경 회관을 나와 이인섭 어르신과 진우(안마)에 갔다. 수령 400년 되는 느티나무가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키고, 지은 지 200년 된다는 (김동욱 가옥) 고택도 구경했다. 안순임(63) 안마반장은 “소를 많이 키우는 마을이라서 그런지 느티나무의 모양이 소를 닮아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소머리를 닮은 것 같다.

이인섭 어르신
전성하 어르신

이인섭(80) 어르신은 “진우마을은 400여 년 전 안씨와 김씨가 살았고, 250년 전에는 전의이씨가 살았다”며 “지금은 여러 성씨가 우애와 화목으로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오룡골은 전성하 전 노인회장과 같이 갔다. 마을 입구에 동신 버드나무가 있고, 산자락에 작은 마을이 있다. 전 전 회장은 “100여 년 전 최초시(과거 초시에 합격)라는 선비가 사랑방에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쳤다”며 “오룡골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학문을 중시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정희(65) 양지마반장은 “양지마는 햇볕과 바람이 축산하기 딱 좋은 조건을 갖춘 마을”이라며 “입촌한 축산농가들도 ‘법 없어도 사는 마을’이란 전통을 이어받아 우정을 보태고 있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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