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조선의 궁궐 경복궁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대표적인 인물 둘을 꼽으라면, 이성계·이방원 부자보다 그들의 책사였던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이 더 쉽게 꼽히지 않을까?

태조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각각 조선 창업의 맞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둘은 고려 말 이색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며 성리학을 공부한 선후배 사이다. 삼봉이 5년 연상이지만 둘은 격이 없이 지냈다고 한다. 둘 다 조선 창업의 일등공신이지만, 최후는 극명하게 달랐다.

정도전은 이방원에 맞서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나 이방원에 충성한 하륜은 죽어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지향점이 달랐고 처세가 달랐다. 이런 까닭으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정도전은 나라에 반역한 역적이 되어 있었지만, 하륜은 경륜 있는 정치가로 남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거북이가 알을 낳는다는 구성산성 남록의 삼판서고택에서 출생하였고, 하륜은 진주 출신이라지만 순흥 출생설이 있는 인물이다. 정도전이 나라의 큰일에 주로 매달리다가 보니 고향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한 반면, 하륜은 그의 지방 첫 수령이었던 영주고을에 영주향교, 제민루, 향서당 등의 흔적을 남겼다.

하륜은 정도전을 벤치마킹했다. 힘없는 정치 유랑자 정도전이 힘을 구하기 위해 함주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가 후일을 도모했듯이, 하륜은 이방원의 장인이었던 자신의 친구 민제를 매개삼아 스스로 이방원을 찾아 나서, 두뇌 회전이 빠르며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이방원과의 주군과 가신의 연을 맺게 된다.

이렇듯 정도전과 하륜은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또 두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디어도 있었다. 당초 하륜은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하다가, 정도전 등의 권고로 조선 건국에 참여하게 된다.

1393년(태조 2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었을 때는 천도(遷都) 논의가 나오자 정도전과 함께 계룡산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중지시킨다. 그리고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하고 나선다.

그러다가 표전문 사건 때, 하륜은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내자고 했다가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는데, 그 때 항복한 왜군을 도망치게 했다 하여 정도전파 사람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어 수원부에 안치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양자는 서로 극도의 원한을 품게 되었고,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 정도전의 대책이 느슨한 반면, 하륜은 이방원에게 먼저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반란군은 정도전의 소재를 찾아내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로서 정도전의 조선 창업은 6년 만에 중단이 되고, 이후 17년간의 실질적인 조선 건국은 하륜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정도전은 그의 정책을 힘으로 밀어붙여 정적을 만들었지만, 하륜은 임금뿐만 아니라 대신들과도 관계를 원만히 가져 정적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험한 시대를 영화롭게 살았다.

치적도 비교된다. 정도전의 하드웨어 중심 치적에 비해, 하륜은 주로 소프트웨어 치적에 속한다. 정도전이 경복궁을 짓고, 4대문을 쌓는 등의 외형적인 틀을 빚은데 비해, 하륜은 내부에 치중하여 고려의 제도를 거의 모두 새롭게 바꾸었다.

의정부(議政府)와 6조(六曹)를 만들고, 관등에 따라 관리들의 관복을 제정하였다. 관리를 임용하는 전선법(銓選法)과 관리들의 평가규정인 고적출척법(考積黜陟法), 그리고 70세 정년퇴직법 등을 만들어 스스로 실천하였다. 또 행정 구획을 다시 정하고, 고을 이름을 바꾸었으며, 조세와 공부(貢賦)를 상세히 정했다. 주민등록증 같은 호패(號牌)를 만들고, 승려들에게는 도첩(度牒)을 발급했다.

같은 이색의 문생(門生)으로 둘 다 정통 유학을 공부하였지만, 하륜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이 있어, 정통 유학의 이론만을 고집하던 정도전과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재상중심제를 주장했고, 하륜은 <원집상절(元集詳節)>를 통해 왕권중심제를 주장한다. 정도전이 끌고 가는 스타일이라면, 하륜은 밀고 가는 스타일이었다.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한 사람이라면 하륜은 도편수였다. 즉, 설계도면에 못질을 하고 흙을 발랐던 사람이다. 정도전이 동북아에 조선을 등장시킨 사람이라면, 하륜은 조선의 테두리 내에서 태평성대를 고민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정도전이 기획과 추진력을 겸비한 혁명가라면, 하륜은 구상과 실천력을 겸비한 행정가였다.

이렇듯 킹메이커 정도전과 하륜은 서로 대조되는 인물이지만 두 사람 모두 조선을 만들어낸 공로자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태조·태종을 능가하는 업적을 쌓았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런 대단한 인물을 한꺼번에 모시고 있다는 점은 다른 지역에서 흉내 낼 수 없는 영주만의 특별한 광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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