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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면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 기와고개(瓦峴)우리마을탐방[179] 문수면 월호2리 기와고개 '와현'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7.12.28 16:27
  • 호수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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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기와굽는 가마(瓦窯)가 있어 ‘기와고개’   
각성(各姓)이 근면·협동으로 잘사는 마을 조성

 

기와고개 마을전경

문수면 기와고개 가는 길
시내 남산육교에서 문수방향으로 향한다. 적서삼거리에서 적서교를 건너 노벨리스 앞에서 좌회전하여 무섬·와현 방향으로 간다. 월호교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오르막길 1.2km 가량 올라가면 도로 좌측에 와현교회가 우뚝하다. 여기가 월호2리 기와고개마을이다. 지난 11일 기와고개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전인만 이장, 백인흠 노인회장, 임복자 부녀회장, 서정근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와현교회

역사 속의 기와고개(와현)
삼국시대 초기 영주의 이름은 날이군(捺已郡)이었고, 옛날에 석공(石工)이 동산골 마애석불좌상을 다듬던 통일신라 때는 날령군(捺靈郡)으로 불렀다. 고려 때는 강주(剛州), 순안(順安)으로 부르다가 조선 태종13년(1413)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조선 중기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기와고개 북쪽에는 권선면이 있었고, 동쪽에는 적포면이, 남쪽에는 진혈면이 있었는데 이 지역은 어느 면에 속했는지 문헌 기록이 없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월호리와 벌사리가 권선면에 편입되어 ‘월호리’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영주군(榮州郡)으로 합치고, 권선면, 적포면, 진혈면을 문수면으로 통합하게 된다. 이 때 기와고개는 영주군 문수면 월호리에 속했다가 해방 후 월호2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산골명동거리

지명 유래
옛날 이곳에 기와를 굽는 와요(瓦窯)가 있어 ‘기와고개’라고 불러오다가 이곳 선비들이 기와 와(瓦)자에 고개 현(峴)자를 써 와현(瓦峴)이 됐다고 한다. 

“어디쯤 기와가마가 있었을까요?”라는 질문에 이 마을에서 4대째 살고 있는 권기옥(77)씨

권기옥 씨

는 “기와가마가 있던 와요지(瓦窯址)가 교회 근처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선친으로부터 들었다”며 “이곳은 기와의 재료가 되는 질 좋은 찰흙이 풍부하고, 주변에 못(瓦峴池)이 있어 물을 끌어 쓰기 편리했기 때문에 조선 중기부터 가마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고 말했다. 기와고개 북쪽에 있는 동산골은 예전에 동산사(東山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동산골(東山谷)이라고 부른다. 또 기와고개 서쪽에 있는 새마을은 무섬에 살던 선성김씨 일족이 이곳으로 이거하여 마을을 이루었는데 새로 생겼다하여 ‘새마을’또는 ‘신촌’이라고 부르게 됐다.

마을의 형성
지금 기와고개에는 옛 문수초등학교 건물에 캠프스쿨이 자리 잡았고, 와현교회는 마을의 상징이 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와현지, 속골못, 피밭골지 등 저수지가 있어 해마다 풍년이다. 전인만 이장은 “월호2리는 기와고개, 동산골, 새마을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50여 가구에 100여명이 사는 농촌마을”이라며 “기와고개 마을이 언제 형성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학교가 세워진 일제 무렵(1930년대) 큰 마을을 이루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영주시사에 보면 「문수면에서 가장 살기좋은마을」이라고 되어있다. 그 이유는 ‘물 관리(저수지)가 잘 되어 농사 짓기 좋은 마을’이란 뜻이 담긴 것 같다.

옛 문수초등학교

옛 문수초등학교 
옛 문수초등학교는 1935년 다락골에서 문수공립심상소학교로 개교했다가 1939년 와현으로 이전하여 졸업생 2,899명을 배출하고 1999년 9월 1일 문수중부초등학교에 통폐합됐다. 백승철(79)씨는 “당시 지역 유지 김여곤(金汝昆, 다락골)씨를 중심으로 학교 설립운동이 추진되어 1935년 12월 12일 다락골(간선공제조합집회소)에서 훈도1명, 학생 68명(1,2학년)으로 개교했다. 그 후 김윤오(와현)·김낙영(다락골)·김낙호(조제)씨의 노력으로 1939년 (적동으로 안가고) 와현으로 이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임준자(55) 부녀회장은 “1970년대에는 학생들이 많아 한 학년이 2반으로 편성됐고, 전교생이 500명 넘는 큰 학교였다”며 “그 때 운동회 날은 면민이 천명 이상모여 큰 축제를 열었다”고 말했다.

동산골 마애석불좌상

동산사와 마애석불좌상
월호교와 기와고개 중간지점에서 우측(서쪽)방향으로 400m 가량 올라가면 월호리 마애석불좌상이 보인다. 높이 5m, 폭 1.5m 크기 바위에  키 98cm, 가슴 47cm 크기로 새겨진 이 불상은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마을 고광흡(73,동산골반장)씨는 “예전에 ‘동산사’라는 절이 있고 그 앞에 석불좌상이 있었다고 한다”며 “1960년대 초 선친께서 석불 인근에서 밭을 갈다가 손바닥크기만한 금불상을 발견했다. 당시 서울 골동품상을 통해 팔았는데 당시 5백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 시청 문화공보실에서 찾아와서 묻기에 자초지종을 알렸더니, 이 불상이 1991년 경북문화재자료 243호로 지정됐다”고 말했다. 그 무렵 동산골 사람들은 불상주변에서 철제불상 등 유물을 주워 엿과 바꾸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와현교회 세운 청년 백인흠
와현지 앞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야트막한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집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교회의 종탑이 우뚝하다. “와현교회가 언제 설립됐나요?”라고 묻자 백승철(79)씨는 “와현교회 설립자는 바로 백인흠 노인회장님”이라면서 “당시 교회를 지을 때 마을청년들이 직접 산에가서 서까래를 해 오고 벽돌을 찍어 교회를 지었다”고 말했다.

설립자인 백인흠(79) 장로는 “1955년 서울 숭인동에 살 때 지인의 소개로 신앙을 얻어 1962년(당시 26세) 고향에 돌아와 우리집 사랑방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는데 농촌 처녀총각들이 많이 모였다”면서 “1965년 군복무를 마치고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과 흙벽돌 1,500장을 찍어 벽을 쌓고, 학가산에 가서 서까래와 싸리나무를 해 가지고와서 지붕을 이었다”고 했다.

백 장로는 또 “그 해 봄에 시작하여 9월에 완공했는데 동산교회 고병무 장로님께서 시멘트, 미장, 창호 등을 지원해 주셨다”고 말했다. 이후 와현교회는 70년대 새마을운동에 앞서 농촌계몽운동에 앞장 서는 등 지역발전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와현교회 연혁을 보면 「1962년 백인흠 씨 댁에서 첫 예배, 1965년 9월 창립예배, 1975 백인흠 장로 임직, 2010년 백인흠 장로 원로장로로 추대」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와고개 사람들
전인만 이장
백인흠 노인회장
임복자 부녀회장
서정근 새마을지도자
강신봉 어르신
백승철 씨
고광흡 동산골반장
임춘화 씨
백승원 성지골반장
임준자 부녀회총무

기와고개 사람들
기자가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이 한방 가득 둘러앉았다. 거실에서 단체기념촬영을 하고, 부녀회에서 준비한 떡과 과일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마을 원로 강신봉(82) 어르신은 “매주 나오는 마을탐방 기사를 보면서 ‘누가 쓰나?’ 궁금했는데 오늘 만나게 되어 반갑다”며 “와현은 예로부터 문수면에서 가장 ‘살기좋은마을’로 명성이 높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을에 훌륭한 지도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복자(66) 부녀회장은 “우리마을은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모여 ‘하하! 호호!’이야기꽃을 피운다”며 “전인만 이장님과 백인흠 노인회장님께서 마을을 잘 이끌어 주셔서 열심히 일하고, 놀 때는 신나게 놀고, 늘 화기애애한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 마을 백승원(59)·장순희(57) 부부는 갑돌이 갑순이 부부로 잘 알려져 있다. 두 부부는 “우리마을은 각성(各姓)이 모여 살면서 근면·자조·협동하여 잘 사는 마을이 됐다”며 “그 바탕에 교회가 있다”고 말했다.

서정근(57) 새마을지도자는 “와현은 벼농사를 기본으로 약초(백수오 등), 수박, 고추 농사를 주로하고 있다”면서 “몇 해 전 가짜 백수오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우리마을은 ‘토종 백수오 생산지’로 유명하다”고 말했다.

임춘화(68) 씨는 “1950-70년대 마을의 모습은 집도 많고 사람도 많이 살았다”며 “정미소를 중심으로 양조장, 가게, 문방구, 식장, 주막, 이발소, 미장원 등 ‘산골명동’이라 할 만큼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말했다.

김순남 할머니

날마다 학교에 간다는 김순남(78) 할머니는 “어릴 적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해 지금 열심히 학교에 다닌다”며 “와현교회 한글교실에서 3년간 공부하여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고, 지금은 노인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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