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78] 이산면 신천2리 ‘새해’

새해마을 전경

460년전 경주손씨 흥경(興慶)이 마을 개척
의성김씨 통덕랑공(興良)파 350년 세거지

마을 표지판

이산면 새해 가는 길
영주농협파머스마켓 적동교차로에서 경북대로를 타고 평은 방향으로 향한다. 운문리(간운)·신천리 교차로에서 내려 영주댐 수변도를 따라 300m 가량 가다보면 새해마을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1km 가량 올라가면 소쿠리모양 지형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새해마을’을 만나게 된다. 지난 3일 새해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우리마을 명물 소달구지

역사 속의 새해마을
새해가 속한 신천리 지역은 조선 초 태종14년(1414년)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옛영주) 남면에 속했다. 조선 중기(1700-1800)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영천군 어화곡면(於火谷面) 굴천리(掘川里)에 속했다가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 때 경상북도 영천군 어화면(於火面) 굴천동(掘川洞)에 편입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을 개편 때 영주군 이산면 신천리에 속했다가 해방 후 신천2리로 분리됐다.

손증준(57) 이장은 “신천2리는 새해 단독마을로 경주손씨와 의성김씨 집성촌”이라며 “1960년대까지는 100여 호에 700여 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40호에 100여명이 사는 작은마을”이라고 말했다.

찜질방과 정자

지명유래
영주시사 지명유래편에 보면 「당초 경주손씨 선조가 강가에 살 때 마을 앞 내성천(乃城川) 모래사장이 넓고 넓어 ‘모래바다’ 같다하여 모래 사(沙)자에 바다 해(海)자를 써 사해(沙海)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성김씨 세보에도 보면 「墓沙海村」이라고 적었다.

이 마을 김상길(73) 씨는 “지금은 내성천에 잡초가 무성하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하얀 모래가 지천이었다”며 “마을 이름을 새해라고 한 것은 모래사장이 바다같이 넓다하여 ‘사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발음이 변해 ‘새해’가 됐다”고 말했다. 조선 때 이 지역은 행정구역상 영천군 어화면 굴천동이었다. “굴천이 어디냐?”고 여쭈니, 김동대(83) 노인회장은 “내매 방향 강변에 ‘굴내골’이 있었는데 굴내골에 한자를 붙이면 굴천골(掘川谷)이 된다”며 “당시 굴내골 주변에 동네도 많고 사람이 많이 살아 장(市場)이 섰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고 말했다.

입향조가 심은 느티나무

경주손씨 마을 개척
경주손씨는 신라 사로국 촌장 구례마을 원조로 하고, 신라 흥덕왕 때의 석종고사의 주인공인 효자 손순(孫順)을 시조로 한다. 고려조까지의 세계가 실존하지 않아 고려 말 판밀직사사를 지낸 손경원(孫敬源)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경주손씨가 영주에 터 잡은 것은 조선 초 1470년경 상주에 세거하던 계림군(鷄林君) 손등(孫登,3세)의 아들 사장(士章,4세)이 당시 영천(옛영주)의 북쪽 도지본면 화천리(현 봉화도촌골내)에 옮겨 살면서 비롯됐다. 이후 사장의 아들 근(瑾,5세)이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가 되고, 근의 손자 난(蘭,7세)이 참봉을 지냈다.

난의 아들 중 3남 흥경(興慶,8세)은 순흥부 도강면 각암(현 부석 뿔바우)으로 살림을 나고, 4남 흥조(興祖,1532-1571)는 영천군 어화곡면 굴천리로 살림을 나 사해마을 개척하게 된다.

경주손씨 새해문중 손기하(70) 씨는 “입향조이신 흥조 할아버지는 저의 15대조”라면서 “흥조 할아버지께서 장성하여 이곳에 정착하셨다면 1555년 전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저희 손가가 새해에 세거한지는 462년이 됐다”고 말했다.

후손 순정준 지도자는 “흥조 선조 이후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해방 후에는 50여 호가 살았으나 산업화·도시화로 많이 떠나고 지금은 20여 호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의성김씨 새해 입향
새해의 의성김씨는 평장사공(휘 椿)의 4자 시중공(휘 행)의 8대손 통덕랑공(휘 興良)의 후손이다. 의성김씨 새해 입향조는 23세손 애립(愛立,1640-1701)이다. 안동 예안에 살던 애립이 영천땅 굴천동으로 이거하게 된 것은 이곳에 세거하고 있던 경주손씨 문중이 인재양성을 위해 설립한 서당에서 학문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의성김씨 새해문중 김상길(73) 씨는 “애립 선조님은 저의 11대조”라며 “안동 ‘모란마을’에 사시다가 경주손씨가 세운 서당에 훈장(訓長)으로 초빙되어 이곳에 오시게 됐다”고 말했다.

김 씨는 또 “애립 선조께서 오실 때 어린 아들(士一,1669-1731)을 데리고 오셨다고 하니, 그 당시를 167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의성김가가 새해에 세거한지는 347년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또 아들 사일(士一) 선조가 장성하여 경주손문에 장가드니 양 성씨는 수백년간 사돈지간으로 살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환(59) 씨는 “애립 선조 이후 15대에 걸쳐 살아오면서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50여 세대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며 “산업화 이후 도시로 많이 떠났지만 지금도 20세대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김흠조 부부묘 출토 유물

김흠조 부부묘 출토 유물

김흠조(金欽組,1461-1528)는 의성김씨 새해 입향조 애립의 5대 선조가 된다. 1997년 영주-평은 간 국도공사 때 분묘(운문1리 소재) 이장 중 김흠조 부부 묘에서 500년 전 복식류 등 총134점의 유물이 쏟아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이장(移葬) 책임자였던 김상길(의성김씨 문중대표) 씨는 “흠조 선조는 저의 16대 선조로 1501년 문과에 급제하고 제주목사, 장예원 판결사를 역임한 인물로 노년에 영주에 사셨다”면서 “당시 묘를 파 보니 관이 40cm 두께의 회장석에 싸여 있었고, 회장석을 깨니 보통관보다 큰 두 관이 나타났다. 관은 이중 관으로 내관과 외관 사이(10cm 틈)에는 물(알콜성분 추정)이 가득 차 있었으며, 관 바깥은 숯으로 채워져 있었다. 관을 해체하니 시신은 미라 상태였다. 출토된 복식(옷)류 66점은 시신이 겹겹 입고 있었고, 만사(19), 제문(19), 분청자기 등 유물(30)은 관속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김 씨는 또 “현장에 골동품 수집상들이 와서 1억 준다면서 팔라고 하였으나 집으로 가지고 와서 방 안에 잘 보관하고 있다가 영주시청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이 유물은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중요민속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되어 현재 소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새해마을 사람들

 

손증준 이장
김동대 노인회장
김정해 부녀회장
손정준 새마을지도자
손순희 할머니
김상길 전 이장
손기하 노인회총무
정재남 부녀회총무
김성환 반장
김상근 미래 연구소장


기자가 지난 2일 사전 답사 차 새해에 갔을 때 버스승강장에서 김상근(60,자연과 미래 연구소장) 씨를 만났다. 그는 “마을탐방 기사를 잘 읽고 있다”면서 자택으로 안내했다. 부인 우경희 씨가 차(茶)를 권해 달게 받았다.

김 씨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4년 전 귀향했다”면서 “가정사역의 일환으로 143쌍 결혼식 주례, 귀농귀촌연합회 자문위원, 이산면주민자치위 분과장, 경북항공고 법인이사, 구미노동지청 일학습병행위원 등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편 부인 우경희 씨는 영주여성합창단을 창단(2017.4.6)하여 ‘선비의 고장 영주’를 ‘선비의 고

우경희 영주시여성합창단장

장답게’하고 있어 주변의 사람들은 두 분의 활약을 크게 기대하고 있다.

3일 오후 마을회관에는 손증준 이장, 김동대 노인회장, 김정해 부녀회장, 손정준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22명이 회관 거실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손순희(86) 할머니는 “새해에서 나서 새해 총각에게 시집갔다”며 “예전에 큰샘 물 여다 먹고 거랑에서 빨래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나이만 많이 먹었다. 우리 부녀회에서 잘해 줘서 호강하고 산다”고 말했다. 김정해(62) 부녀회장은 “우리마을부녀회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서 “선대로부터 물려주신 효(孝)를 잘 실천하고, 예(禮)를 존중하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정재남(62) 부녀회총무는 “우리 부녀회는 단합이 잘 되고 적극적”이라며 “쓰레기분리수거, 빈병, 박스 모으기 등으로 기금을 모아 어버이날 행사, 효도관광, 찜질방 신축, 어르신 식사 등 어르신들을 잘 모시고 있다”고 말했다. 손증준 이장은 “마을의 농업은 수박, 고추,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마을의 전통은 정월보름날 서낭제를 지내고, 입향조가 심었다는 500년 동수목을 잘 보존하고 있다. 또 마을의 명물이라 할 수 있는 소달구지(전우벽 73) 1대가 있다”고 말했다. 마을탐방을 마치고 돌아올 때 기자를 성황단까지 안내해 준 김성환 반장님께 감사드리고, 마을탐방 1주일 전 마을의 내력을 미리 알려 준 김상복(새해출신,전 남산초 교장)님께도 감사드린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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