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76] 휴천3동 아랫전단 ‘전계’

장수희, 소수서원 사액의 밀알 · 이산서원 창건
곧은 성품과 절의(節義)를 지닌 선비 장여화

전계마을 전경

휴천3동 전계 가는 길

남산육교 사거리에서 농협파머스마켓 방향으로 간다. 조암교-수청교를 지나 수청정미소 앞에서 좌회전하여 철도건널목을 건넌다. 수청휴정(水靑休亭) 앞에서 영남자동차학원 방향으로 300m쯤 가면 500년 수령의 우람한 소나무 두 그루가 전계마을 동구(洞口)를 지키고 있다. 지난 21일 전계마을에 갔다. 이날 최락당 옆 장봉덕고택에서 인동장씨 전계문중 사람들을 만나  전계(箭溪) 마을의 유래와 최락당과 전계초당 이야기를 듣고 왔다.

전계와 조암

행정구역의 변천

이 지역은 태종 14년(1414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영주의 옛이름) 남면에 속했다. 조선 중기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영천군 어화곡면(於火谷面) 전단리(箭丹里)에 속했다가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 때 경상북도 영천군 어화면(於火面) 조암동(槽巖洞)에 편입됐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주군 이산면 조암동이 됐다가 19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영주시 휴천3동(5통)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00년 수령 소나무

지명유래

‘전계’라는 지명은 인동장씨 영주 입향조 장응신(張應臣,1490-1554)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천 화장(花庄)에 살던 장응신이 영주 초곡에 사는 창계 문경동(당시 성균관사성)의 사위가 되어 살림 난 곳이 전계마을이다. 당시(1510년)는 전계라는 지명이 없었기에 초곡 변두리 마을로 살림 난 것이다. 이 마을에 사는 장정덕(65) 종친회사무국장은 “마을이름을 전계라고 한 것은 입향조이신 응신 할아버지의 손자 여화(汝華,1566-1621) 선조께서 마을 앞을 흐르는 계곡물이 어찌나 세차게 흐르는지 마치 화살이 날아가는 것 같다 하여 화살 전(箭)자에 시내 계(溪)자를 써 ‘전계(箭溪)’라고 이름 지으셨다”고 말했다. 

또 영주지에 보면 「단양군수 신세인(申世仁)이 임진왜란 때 죽령에 올라 신에게 ‘정착지를 인도해 줄 것’을 기도한 후 화살 끝에 붉은 천을 달고 힘껏 당겼더니 지금 전단 땅에 꽂혀 전단(箭丹)을 정착지로 정했다고 하는데, 그가 정착한 곳이 ‘윗전단’이라고 한다. 또 조선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곳 선비들이 상의하여 마을이름을 ‘조암’이라고 지었다. 조암(槽巖)이란 전계(시내) 바닥에 실금(보막이) 구실을 하는 바윗돌이 층층 있었는데 이 돌의 모양이 구유(마소 먹이통)를 닮았다 하여 구유 조(槽)자에 바위 암(巖)자를 써 ‘조암동(槽巖洞)’이 됐다.

입향조 장응신의 집터

이산서원 설립의 주역 장수희

장수희(張壽禧,1516-1586)는 인동장씨 직제학 계(桂)의 9세손이고, 조선 개국 적개공신 말손(張末孫)의 증손이며, 1509년 문과에 급제하고 해주도사를 지낸 맹우(孟羽))의 손자이고, 인동장씨 영주 입향조 생원 응신(應臣)의 아들이다. 퇴계의 제자를 수록한 ‘도산급문제현록’에 보면 309명 제자들의 이름이 올라있는데 퇴계의 최초 제자는 영천 장수희(張壽禧)라고 기록돼 있다. 장수희는 호가 과제(果齋)이고, 본관은 인동으로 영천(榮川, 옛영주) 초곡에서 태어났다.

초곡은 그의 외갓집(외조부:문창계)이기도 하고, 퇴계 선생의 처가(허씨부인)집이기도 했다. 퇴계가 21살 때 초곡으로 장가들어 처가에서 살 때 장수희는 6살 소년으로 퇴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퇴계의 제자 1호가 된 것이다. 퇴계는 그의 영특함과 밝은 성품에 호감을 얻어 ‘최락당(最樂堂)’ 3자를 손수 써 주었다. 장수희가 장성하여 백운동서원 일을 볼 때 서원의 사액을 퇴계 선생에게 청하여 ‘소수서원’ 사액(1550년)이 내리도록 하는데 밀알이 되었다. 그 후 1554년 이산서원 건립 당시 수장(首長)으로 선출되어 군수 안상(安상)에게 학사 건립을 청하여 승인받았고, 1558년 학사건립 설계부터 1559년 준공하여 ‘이산서원’이라 명명하고, 퇴계 사후 위패를 봉안하는 일까지 주관함으로써 서원의 창건과 운영의 주역이 됐다. 특히 동방사학의 최초 학칙인 ‘원규’를 정립하여 전국 83개 고을 서원운영의 지침이 되게 했다.

퇴계가 쓴 최락당

퇴계가 써 준 ‘최락당

전계 웃마 맞은편에 최락당(最樂堂)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장수희 선생의 학덕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최락당기 등 옛 문헌에 보면 「최락당은 장수희가 1560년경 건립한 서재였다. 선생 사후 후손들이 이 서재에 퇴계가 써준 최락당 편액을 걸었다. 그 후 화재로 문적과 유물이 모두 소실됐다」는 기록이 보인다. 후손들이 편액만 보관해 오다가 1786년 반곡(蟠谷,서릿골)에 분암(墳庵,齋舍)을 짓고 대청에 최락당 편액을 걸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분암이 허물어 1800년대 중반 후손들이 여럿 사는 이산면 운문1리(바랑골)에 최락당을 세웠다가 다시 퇴락하여 1980년 전계 현 위치로 이건했다.

장성하(72) 연복군종친회장은 “과제 선조는 퇴계 선생의 고제(高弟)로 성리학에 정통했고, 이산서원을 세워 후진양성에 진력한 유학자요 교육자”라고 말했다. 장봉덕(68) 과제공숭모회장은 “최락이란, 선이 충만하면 즐거움에 도달한다’는 뜻”이라며 “선조님들이 말씀하시기를 ‘有一善(유일선) 則思所以服膺而勿失(즉사소이복응이물실) 선이 있으면 몸에 배이기를 생각하고/有一惡(유일악) 則思所以勇改而決去(즉사소이용개이결거) 악이 있으며 용감하게 고쳐서/積之之久以至於樂(적지지구이지어락) 이러하기를 점점 쌓아 즐거움에 이르게 되면/則其爲善也大矣夫(즉기위선야대의부) 선을 실행함이 크게 된다’고 하셨다 면서 최락은 곧 ‘최고의 선이 최대의 기쁨이 된다’는 뜻 같다”고 말했다.

황기로가 전계초당

절의의 선비 장여화

전계 초입 동수나무에서 200m 가량 올라가서 왼쪽으로 보이는 산자락에 전계초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 초당은 성균관 진사 장여화의 집이었다. 공이 성균관에 유학하고 있을 때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직접 목격하고는 문과에 응시하지 않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전계 가에 초당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장여화는 당시 초서(草書)의 대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에게 ‘전계초당’ 4글자를 부탁했다. 그는 “내가 흥이 날 때 써 준다”고 했다. 장공이 황공과 부석사에 놀러 갔을 때 황공이 갑자기 말하기를 “내가 지금 흥이 났으니 빨리 종이를 가지고 오게”라고 했다. 그는 산 벽 위에 있던 등나무 줄기 하나를 꺾어 그 끄트머리를 이로 씹어 붓으로 삼아 일필휘지로 4자를 썼다. 쓰여진 글자들은 '箭'자는 죽순과 같았고 '溪'자는 물결과 같았다. '草'자는 뽑힌 풀과 같았고 '堂'자는 집이 서있는 것 같았다. 황공 스스로도 평생 득의(得意)의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장공 후손들은 지금도 가보로 잘 간직하고 있다.

후손 장동영(73) 씨는 “전계초당 글씨 원본은 장수 장말손유물각에 소장되어 있고, (종이에 찍기 위한) 목판은 우리집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지난봄에 유물각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전계마을 사람들

기자가 마을에 갔던 날 최락당 옆 고택 사랑방은 군불을 넣어 뜨끈뜨끈했다. 이날 전계에 살고 있는 인동장씨 사람들이 다 모였다. 장진덕(61)씨는 “1960년대까지는 우리 장가만 30여 가구가 살았으나 산업화 이후 도시로 많이 떠나고 지금은 7집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인동장씨가의 며느리가 된 박해자(63)씨·김명옥(61)씨는 “시댁(인동장씨) 사람들은 훌륭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며 “묘소를 관리하고 불천위제사를 지내고, 시제를 지내는 일 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장봉덕 숭모회장은 “현재 전계에 사는 우리 문중은 몇 집 안 되지만 효를 근본으로 선행의 본을 보이고 있다”면서 “장동형·김중순 부부는 효행이 지극하여 보화상을 받았고, 장진덕·이순자 부부는 효성이 널리 알려져 KBS·MBC TV에 소개됐다”고 말했다.

장정덕 씨는 “인동장씨가 500년간 세거해온 전계마을은 진사 여화·장선, 생원 용우·용·직방·위방·태기, 학생 신·숙, 문과 후상·위긍 등 많은 과환과 문행을 배출했다”며 “현대에 와서도 장윤석 전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교수, 의사, 교장 등 각계각층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고 말했다. 고택에서 나와 장봉덕씨와 마을을 둘러봤다. 들꽃차 전문가이신 이순자(59)씨 집에서 들꽃차를 맛봤다. 들꽃차에 관심 있는 분이나 수제 들꽃차를 원하시는 분은 010-2638-8282로 연락주시면 도움 드리겠다고 말했다. 김중순(66)씨 집에서는 보화상 상장도 보고 당시 공적 개요도 읽어봤다. 이분 이야기는 KBS 인간극장에 추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서 입향조 장응신의 집터, 전계초당이 있던 자리에도 가봤다.

지난 10월 추석 연휴 때 이 마을 출신 장화덕(58,부산)씨를 만나 과제 선생이 심었다는 수령 500년 소나무와 조암의 흔적, 거북바위의 내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마을 탐방에 크게 도움이 되어 감사드린다.

휴천 3동 아랫전단 전계 사람들

장봉덕 숭모회장
장성하 종친회장
장정덕 종친회사무국장
장동형 씨

 

김중순 씨
박해자 씨
장화덕 씨
김명옥 씨
장진덕 씨
이순자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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