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영주 톺아보기 우리마을 탐방
의산서원의 본향 성곡2리 의산마을(분지거릉골)우리마을탐방[174] 장수면 성곡2리 의산(義山)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7.11.16 15:17
  • 호수 643
  • 댓글 0
의산마을 전경

의산서원, 본래 ‘분지거릉골’ 옛 절터에 건립
선산인 김상임(金商琳) 1640년경 ‘의산’ 입향

장수면 의산 가는 길
의산마을은 영주시내에서 서남쪽(장수면) 주마산 아래에 있는 오지마을이다. 장수 IC사거리에서 성곡 방향으로 5km쯤 가면 성곡1리 배태마을이 나온다.

여기서 서남방향 산길 1km 가량 들어가면 의산 아랫마을이 나오고, 다시 오르막길 500m 정도 더 올라가면 의산서원의 본향 의산마을이다. 지난 5일 의산마을을 찾아 갔다.

마을 초입에서 김옥연·김점순 할머니를 만나고, ‘진대이들’에서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내력과 전설을 듣고 왔다.

의산마을 표석

역사 속의 의산마을
성곡리 지역은 1413년(태종 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정할 때 영천군 서면(西面)에 속했다. 조선 중기(1700년대) 무렵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두전리(豆田里) 별태방(別太坊)이라 부르다가 영조 이후(1800년대)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두전면 별태리가 됐다.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 때 두전면 성곡리(城谷里)가 되었다가 1914년 일제 때 장수면 성곡리(星谷里)로 개편되고, 해방 후 성곡2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문헌이나 행정구역에는 의산(義山)이란 지명이 없다. 김덕희 이장은 “의산마을은 선산김씨가 400여년 세거해 온 집성촌으로 40여호가 살았으나 무술(戊戌.1958년)수해 때 절반 이상 아랫마을로 이거했다”면서 “현재 본마에 7호, 아랫마에 11호 등 모두 38명이 살고 있는 작은마을”이라고 했다.

동구 소나무숲

지명 유래
이곳에 서원이 설립되기 전에는 ‘행의사’라는 고려 때 세운 절이 있었다. 그 당시 이곳은 ‘분지거릉골’이라고 불렀다. 의산서원 설립과 관련된 문헌에 보면 이곳 지명을 ‘의산(義山)’이라 쓰고 괄호 안에 ‘분지거릉골’이라고 기록했다. 옛 갈산 사람들이 옛 절집을 보수하여 ‘의산서당(義山書堂)’이라 편액할 때 ‘의산’이란 지명이 탄생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마을 김점순(84) 할머니는 “예전에 ‘분지거릉골’이라고 들어본 듯하다”며 “본마와 아랫마 사이에 있는 들을 ‘분지들’이라 하고 내(川)를 거릉이라 하였으니, 웃마에서 아랫마로 흐르는 골짜기를 ‘분지거릉골’이라 불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 마을 출신 김의환(金義煥.52.충북대) 교수는 “어릴 적 할아버지께 들었다”면서 “선산김씨(善山金氏)가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고향 선산(善山)을 그리워하면서 ‘착하고 의롭게 살자’는 뜻으로 옳을 의(義)자 ‘의산(義山)’이라 이름 지었다”고 말했다.

옛 의산서원이 있던 자리

의산서원의 설립
군(郡)의 서면 궁벽(窮僻)한 이곳은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임진왜란(1592) 전 갈산에 사는 이개립(李介立.1544-1625)과 지역 사림(士林)이 서당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중지되었다.

전란이 끝난 후 군수 진상홍(秦尙弘)과 이개립의 아들 이희음(李希音)이 사림과 의논하여 1610년 행의사(行衣寺) 절터에 서당을 건립했다. 그 후 현종 5년(1664) 김응조의 적극적인 후원과 경주이씨 주도로 이개립을 제향하고 ‘절효사’라 하여 가문적 위상을 높혔다.

또 숙종 5년(1679) 김응조를 추향하면서 학문적 명망이 높아짐에 따라 숙종23년(1697) 의산서원(義山書院)으로 승격됐다.

이후 고종 8년(1871) 서원 훼철령에 의해 철폐됐으나 강당과 재실은 유지해 오다가 1982년 갈산리 현 위치로 이건했다. 후손 이중호(성곡1리) 어르신은 “의산서당 설립 후 이개립 선조의 후손들이 사마시 입격자 6명, 문과 급제자 8명을 배출하여 가문적 위상을 한층 높혔다”고 말했다.

소남정(小南亭)

선산김씨 세거지
의산서원이 있었던 의산마을은 선산김씨 집성촌이다. 선산김씨가 의산에 입향한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6일 아침 김성환(77) 씨를 찾아가 세보를 펴봤다.

이 가문은 인조대 중반(1640년경) 이곳에 서당이 설립되자 학문에 뜻을 두고 선산으로부터 이곳에 입향했다고 한다. 입향조는 김상임(金商琳.본명:末山.1616-?)이고 그의 부인이 동래정씨다. 이개립의 손자 이상언(李尙彦.1597-1671)의 부인이 동래정씨인 것으로 보아 이와 관련하여 입향한 것으로 보여진다.

김성환(33세손) 씨는 “선산김씨 의산문중은 시조 김선궁(金宣弓) 하(下), 14세 농암공(籠巖公.주澍)파 하, 23세 상임(商琳) 입향조 하, 25세 소남공(小南公.중규重奎) 파로 세계를 잇고 있다”면서 “선조들은 의산서원에서 학문을 수학하여 입향조의 손자 중규 선조는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추증되고, 증손자 가팔(嘉八)은 절충장군 부호군에 오르셨다”고 말했다.

성황단

부인 신의자(74) 씨는 “선산김씨 문중은 조상의 얼과 덕을 잘 따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며 “향사나 제사도 한치 소홀함 없이 정성을 다한다”고 말했다.

후손 김규호(76) 씨는 “소남공 중(重)자 규(奎)자 선조를 기리기 위한 소남정(小南亭)이 50여 년 전 아랫마을에 세워졌다”며 “소남정은 의산문중정자”라고 말했다.

김두혁 선생 공덕비

옛 ‘행의사’ 터에 ‘의산서원’ 설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에 「榮川 寺刹 行衣寺, 在郡西 二十五里」 ‘행의사(行衣寺)’에 대한 기록이 있다.

행의사는 고려 때 세워진 절인데 조선 건국과 함께 억불숭유 정책이 추진되면서 제 모습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을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서당을 건립될 때 승려들이 강력 반발하자 불상과 관련 물건들을 연못에 모두 버리고 추진했다’고 한다.

김의환 교수는 “지금도 절터 주변에 가면 기단석, 탑재, 기와조각, 도자기조각 등을 흔히 볼 수 있다”며 “이곳은 주마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두 팔로 마을을 감싸 안은 듯한 모습으로 앞쪽이 탁 트여 있어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말했다.

의산서당 설립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이개립(경주이씨)은 이곳의 경치가 빼어나고, 조용하고, 난을 피할 수 있는 적지이기에 일찍이 서당자리로 점찍어 두었던 곳이다.

옛절 흔적(탑의 기단)

동구(洞口) 소나무숲
의산마을에 들어서면 동구의 소나무가 눈길은 끈다. 300년 수령의 소나무 숲속에 성황단이 있고, 그 옆에 거북바위가 있다. 또 마을 앞에는 입향조(김상임)가 심었다고 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장정자(81) 할머니는 “동구 솔숲은 외부의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마을의 길복(吉福)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선조님들이 심은 수구막이숲”이라고 말했다.

갈미에서 15살에 시집왔다는 이종록(86) 할머니는 “동구 솔숲에는 동신(洞神)을 모시는 성황단이 있는데 해마다 정월대보름날이면 우물을 청소하고, 목욕재계한 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며 “보름날은 마을사람들이 다 모여 음복을 함께 하면서 화합의 찬치를 연다”고 말했다.

김옥연(84) 할머니는 “성황단 옆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거북바위가 있고, 1976년 새마을운동 때 많은 새마을물자를 지원해 준 김두혁(송암재단이사장) 선생 공덕비도 있다”며 “당시 마을에서는 답례로 싸리비를 매어 영주고·선영여고에 보냈다”고 말했다.

의산 아랫마을

의산마을 사람들
기자가 마을에 갔을 때 김옥연·김점순 할머니께서 길옆 나무더미에 앉아계셨다. “여기 마을회관이 어디냐?”고 여쭈니, “마을회관이 없다”고 했다. 기자가 여러 마을을 다녔는데 ‘회관이 없는 마을은 이 마을뿐’이 아닌가 생각된다. 잠시 후 김광환(78) 씨도 나무더미에 앉았다.

김 씨는 “마을 주변 땅이 모두 선친께서 물려준 땅인데 가족과 상의해서 마을회관 부지로 기증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말했다. 기자는 “내년에 마을회관이 준공되면 시장님, 국회의원님과 함께 와서 회관 건립을 축하드리고, 신문에도 크게 내겠다”고 약속했다.

잠시 후 ‘새대이들’로 이동하여 김덕희 이장님 생강밭에서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이숙희(72) 씨는 “아랫마을을 기준으로 위쪽들을 ‘새대이들’이라 하고 아래쪽을 ‘진대이들’이라 한다”며 “예전에 물이 없어 바가지로 물을 퍼서 농사지었으나 지금은 농지정리와 양수시설이 잘 되어 해마다 풍년”이라고 했다.

동샘

권분자(76) 씨는 “지금은 영주시내가 가깝지만 예전에 아이업고 애고개 넘어 병원 갈 때는 멀고 먼 영주였다”며 “지금도 교통이 불편한 오지마을이지만 행복택시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본마로 올라가는 길에 김광환씨의 부인 권종희(78) 씨를 만났다. “마을회관을 지을 수 있도록 가족들이 잘 상의해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권씨는 “그렇게 해야지요”라고 말했다. 내년에 건립된 의산마을회관을 상상하며 배태재를 넘었다.

<장수면 성곡2리 의산마을 사람들>

김덕희 이장
이종록 할머니
김옥연 할머니
김점순 할머니
장정자 할머니
김광환 씨
권종희 씨
김규호 씨
권분자 씨
이숙희 씨
김성환 씨
신이자 씨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영주시민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포토뉴스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