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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 확대경[126] 학맥을 형성한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7.11.16 15:19
  • 호수 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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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한정 마을 서편 언덕에 있는 소고대 정자

오는 11월 19일로 탄신 500주년을 맞는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은 1517년 11월 19일 영주동 뒤세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조선 명종과 선조 때의 문신이며 학자였고, 퇴계의 문인이자 수제자였다.

그는 7형제 중 여섯째아들로 태어났다. 7세 무렵에 조부와 부친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웠고, 9세 때에는 복희의 팔괘(八卦)를 배운 뒤, 혼자 들어 앉아 직접 64괘를 그리며 음양의 변화를 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세 무렵에 『대학』과 『논어』를 독파하였으며, 암송과 독서를 특히 잘했던 그는 15세에는 서전(書傳)을 읽었으며, 16세부터는 주자(朱子)의 저술을 스스로 연구하여 도학(道學)의 정수를 깨우쳤다고 한다. 그러고도 의문이 점점 늘어나자 21세에 스스로 퇴계를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된다.

퇴계의 제자가 되고부터 소고는 특히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그리고 주자서(朱子書) 등 경전의 학습과 이해에 전력하였다. 이 외에도 농암 이현보와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등 인근의 이름난 성리학 학자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세태에 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퇴계의 성리설을 이어받아 심학(心學)의 측면을 강조하였고, 이와 기에 관해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견해를 계승하였다. 천문학에도 밝았고, 수학에도 뛰어나, 왕으로부터 역법을 교정하라는 특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소고의 문하에는 권문해, 김개국, 김륵, 이여빈, 배응경 등 쟁쟁한 60여명의 제자가 있어 이황학파의 학맥을 이어갔으며, 또한 9명의 제자가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들 모두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이른바 행동하는 선비의 규범을 실천한 소고학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홍문관에 있을 때는 왕의 신임이 두터웠지만, 군왕에 대한 충언을 담은 1만여 자 상소를 올리는 등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수찬에 승진되고, 이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30세가 되던 1547년(명종 2)에는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 41세에 풍기군수로 임명되었고, 49세에 동부승지로 전직되었다가 얼마 뒤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52세가 되던 선조 2년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54세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56세 되던 1573년 도승지로 승진되었으며, 이듬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59세에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여주목사, 춘천부사를 거쳐 66세에는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왕의 뜻에 거슬려 창원부사로 좌천되는 어려움도 있었다.

특히, 젊은 시절 27세 때 호당(湖堂 - 독서당)에서 당대의 촉망되는 젊은 문사에게만 주는 특별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사가독서의 특전은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소재 노수신 등이 받았으니 소고의 학문의 반열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고의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은 귀내마을에 있다. 본래는 뒤세마을에 있었으나 수해로 훼손되면서, 귀내로 옮겨졌다.

휴천동 하한정마을에는 ‘삼락당’이 있는데, 소고가 번잡한 곳을 피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여름에도 시원한 곳’이라고 해서 ‘하한정(夏寒亭)’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소고는 이곳 ‘삼락당’에서 생을 마무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삼락당 앞마당에는 소고가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400년이나 되는 향나무가 ‘삼락당’을 지키고 있다. 삼락당 서편 언덕을 소고대라 하는데, 소고가 자주 올랐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40여 년 벼슬살이 동안 너무나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여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지켜 고향에도 기와집 하나 남기지 않았고, 서울 생활 30여 년 동안 여기저기 셋집을 얻어 가며 가난한 살림을 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혹 봉급이 좀 저축되면 즉각 서적과 바꾸었단다. 방에는 말끔한 책상 하나 소박하게 놓였을 뿐인데, 온 벽은 책으로 빼곡하였다고 한다. 고개 숙이면 글을 읽고, 머리를 들면 무언가 생각하였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이 재상댁(宰相宅)인 줄 모를 정도로 문 앞이 늘 조용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는 학문 앞에서는 결코 조용하지 않아 여러 곳에 분주히 다니며 문의하곤 하였다.

스승인 퇴계가 ‘영유소고 풍유금계(榮有嘯皐 豊有錦溪)’라고 표현했듯이, 특히 동갑내기 금계와는 학문을 양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뜨거운 경쟁이 그들의 학문을 더욱 높이지나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이처럼 번듯한 학파, 학맥을 형성하고도 소고는 죽기 이틀 전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학문이 본래 엉성하고 나약한데도 제군들이 낮밤으로 상종하였으니 내가 많이 부끄럽다.”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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