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공광규

소주병

詩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화인처럼 찍힌 그 날이 떠오른다.

내가 기독병원 원무과에 근무할 때 아버지는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다. 하지만 한 번도 진료를 받으러 온 적이 없으셨다.

초라한 당신의 모습이 오히려 딸에게 지장이 될까 봐 그런다고 하셨다. 그러나 ‘연이틀 동안 이곳저곳 다녀도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나의 성화로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에 오셨다.

링거를 다 맞고 컴컴하게 어둠이 번지는 시간, 병원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는 당신의 처진 어깨를 보았다.

처음으로 느낀 야위고 쓸쓸한 모습이었다. 이 시를 만나던 날 울컥하며 그날이 생각났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부는 초겨울거리에 무너질 듯 휘청거리며 걷던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평생을 다 쏟아 붓고 이제는 텅 비어 형체만 남은 빈 소주병 같았다. 늦가을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이듬해 이른 봄 뭐가 그리 급하신지 꽃상여를 타고 먼 길을 떠나신 나의 아버지. 이 가을 시 한 편에 그리운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전영임-시낭송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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