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2011년, 중국은 우리의 아리랑을 자국의 국가무형문화재로 등록했다. 내친김에 아리랑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준비하였다.

깜짝 놀란 문화재청이 부랴부랴 아리랑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위하여 동분서주했음은 물론이다. 이후 양국의 숨 가쁜 아리랑 경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2012년 말, 유네스코는 한국이 신청한 아리랑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2014년에는 북한의 아리랑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럼에도 애매한 문화재등록법에 의거한 국내 아리랑은 정작 문화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버려져 있는 실정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5년 9월, 가장 늦게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로 아리랑이 지정된다. 이제 2년을 지난다.

우리 민족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은 민족의 혼과 삶과 애환을 담는 훌륭한 그릇이었다. 그래서 아리랑 속에는 삶·흥·사랑·해학·용기·눈물·그리움·희망·단결 등 한민족의 모든 정서가 들어 있다.

농부·어부·광부들의 애환이 담겨 있고, 고비 때는 민족을 하나로 묶는 끈끈한 가락이기도 했다. 아리랑이 민족의 가락이기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을 그린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아리랑>

아리랑은 민족 고유의 에로스이고, 내면의 형체이다. 심장의 박동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한국인의 만다라’라고도 불린다. 광복절과 설날에도 아리랑을 불렀고, 힘든 삶의 현장에서도, 이역만리 사할린 땅에서도 아리랑에 기대어 살았다.

맘 울적할 때도, 영화 제목이 궁색할 때도 아리랑부터 찾아 나섰다. 한국의 대표 소설도 아리랑이요, 아리송한 뮤지컬 이름도 아리랑이다. ‘논두렁아리랑’, ‘낙동강아리랑’, 지평선마저 아리랑이다. 누구는 미리 통일국가의 애국가를 아리랑으로 정해 두었단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리랑이 무슨 한(限)이나 잔뜩 짊어진 그런 저급한 노래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적어도 아리랑은 민족(랑-郞)의 큰 줄기를 배경으로 아리도록(아리) 쓰리도록(쓰리) 사무치는 가슴, 치열한 아픔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큰 산하의 가슴을 은유적으로 풀어낸 것이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음·양의 이치에 순종해, 하늘에 대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비유적으로 삶을 나타낸 노래가 아리랑이므로, 아리랑은 민족(아리랑)의 고비(고개)를 넘을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고달픈 삶이 아리랑(민족)의 굽이굽이(고비)에서 꺾이는 리듬을 만들고, 삶의 이야기로 사설이 되어 아리랑 리듬에 입혀지게 되는 것이다.

<사할린아리랑>, <쏭화강아리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9세기 말,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두만강을 건넜던 한민족의 삶은 고난이 가득한 행로였다.

연해주 독립운동 성지의 신한촌사건, 자유시사변을 겪어야했고, 스탈린의 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등 모진 시련을 겪었다.

급기야 1937년 9월, 나라 없는 18만 한인들을 화물열차에 실어 무려 6,000㎞나 떨어진 중앙아시아 사막의 허허벌판에다 던져놓았다. 거기서 그들은 숟가락 하나 들고, 토굴을 파가며 눈물로 황무지를 일구었고,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1990년대 초 구소련의 붕괴로 부활된 자민족주의의 횡포로 고려인은 또 다시 어디론가 떠나야하는 기구한 운명이 된다. 그들은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모든 한글학교도 폐쇄하였다.

아리랑을 부르면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던 사할린의 할머니는 ‘한국이 큰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몇 번씩이나 되풀이했다고 한다. 고려인의 유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50만 고려인 중 모국으로 돌아온 고려인은 약 10%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재외동포법상 고려인 4세는 외국인으로 분류돼, 만 19세가 되면 다시 한국을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몇 세대를 거쳐 수도 없이 부르던 아리랑을 또다시 애절하게 불러야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리랑고개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조국독립을 위해 항일투사들이 건너간 중국지역에는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아리랑이 탄생하였다. <광복군아리랑>, <독립군아리랑>, <혁명아리랑>이 그것이다.

이국에서 망국노로 살아가면서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선인에게 아리랑은 저항의 상징이었다.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일제에 의해 삶의 뿌리가 뽑힌 민족의 고개를 의미한다.

이들에게 있어 아리랑고개는 ‘이별고개’이고, ‘원한고개’이며, ‘설움의 고개’였다. 특히, 일제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고향과의 생이별은 조선족이주사의 축도로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른바 <조선족아리랑>이다.

조선족인 천진사범대 전월매 교수는 “한반도 남북의 삼각점에 있는 중국조선족은 어제도 아리랑을 불렀고, 오늘도 아리랑을 부르고, 내일도 아리랑을 부를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아리랑고개를 넘을 것이다.

아직도 긴장이 팽팽한 한반도 갈등의 아리랑고개, 그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유전자 압축파일 같은 존재이다. 이념과 예술을 넘어 손에 손 잡고 마음을 틀 수 있는 대동과 상생의 아리랑한마당을 그려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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