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세종의 한글 반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우선은 나라 안의 중신들과 유림들이 이 글자를 능멸할 터이고, 나라 밖으로는 명나라 황제가 이를 불충불온으로 여길 터. 그리하여 아버지 세종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새 글자로 짓고, 아들 수양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이라는 불서(佛書)를 이 글자로 지었다.”

내친김에 세조(수양)는 등극 후 아버지 세종의 「월인천강지곡」과 자신의 「석보상절」을 합쳐 「월인석보」까지 만들었다. 1929년 희방사에서 그 목판이 발견되었었다.

지금까지 전국 각지에서 발견된 「월인석보」 25권 중 1,2권이 희방사본이며, 인근 비로사에서는 7,8권이 발견되었다.

특히 희방사본 첫머리에는 <나랏말ㅆ미…>로 시작되는 훈민정음 서문이 실려 있어 그 가치가 무궁하다. 이른바 <훈민정음 언해본>인 셈이다. 한글을 아버지 세종이 짓고, 아들 세조가 전파했다고나 할까?

일반적인 상식으로 「훈민정음」은 집현전에서 만들고, 왕은 이름만 걸치듯 했을 것 같지만, 실제는 세종이 직계가족과 극비리 인선된 인물을 통해 직접 비밀리에 행한 프로젝트였다는 주장이 최근 붉어지고 있다. 훈민정음 서문은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시작되는데, 이때의 어제(御製)는 왕이 직접 간여한 일에만 쓰는 표현이란다.

어떻게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과정에 깊이 관여했다는 말로 풀이될 수 있다. 세종은 즉위 다음해, 원경왕후의 천도제 염불을 인연으로 험허와 그의 제자 신미를 은밀히 궁으로 초청한 일이 있는데, 이때 신미가 모든 백성이 『대장경』같은 불서를 읽을 수 있도록 우리 글자를 만들어달라고 제안한다.

이후 세종과 신미가 비밀리에 ‘한글창제’에 착수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최근 영산김씨 측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신미대사는 지금까지 한글창제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는 집현전 학사 영산김씨 김수온(金守溫)의 친형이다.

신미는 임금이 일러준 글자 원리로 범어의 자음모음 연구를 시작한다. 세종은 신미를 아예 집현전 학사로 제수하지만, 유신(儒臣)들의 눈총을 피해 정음청(正音廳)이라는 임시 관청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고, 마침내 1443년 12월,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 앞에서 훈민정음 창제를 공개한다.

세종의 결단과, 신미의 생명 위협 속에서 창제된 훈민정음이었다. 이때까지는 집현전 학사들의 상당수가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기에, 즉각 최만리 등 원로들이 한글창제의 부당함을 상소하기까지 하게 된다.

반대의 배경에는 훈민정음의 원리적 근거가 유교가 아닌 불교였다는 것이고, 그 불교의 한가운데에 신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글창제의 창(創)은 세종, 제(製)는 신미였다고까지 일각에서는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세종도 언어학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여, 집현전 학자들과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신미대사는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전문가로 그의 그런 지식이 훈민정음 창제에 역할을 한 것으로 연결되고 있다.

유학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숨겨진 전문가 신미를 활용했고, 숭유억불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에서 승려의 국정 역할을 공식기록으로 남길 수가 없었기에 세종의 단독작업으로 묻어간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 훈민정음 서문이 108자로 구성된 점, 월인석보 제1권의 페이지 역시 108쪽이라는 점,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언해본 대다수가 사찰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 불자 참여의 증빙이라고 한다.

하여간, 희방사에서 발견된 불서 <월인석보> 앞부분은 훈민정음 언해로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에 견줄 수 있는 국보중의 국보이다. 올 1월 <월인청강지곡>이 국보로 승격되었다. 마찬가지로 희방사의 <월인석보: 보물 제745호>도 국보로 승격돼야 마땅하다는 의견이다.

이런 대단한 문화재 판본을 6.25전쟁 때 피신시키지 못한 영주인들의 죄가 결코 가볍지 않았을 텐데도, 누구하나 복원 등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는 있는 동안, 인근 안동시에서는 지난해 훈민정음 해례본 복각사업에 이어, 올해는 아예 풍기 희방사의 훈민정음 언해본까지 자신들이 복각에 나서겠다고 지난 7일 착수 보고회까지 마쳤다. 이런 사실을 영주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훈민정음 언해본 정도의 국보라면, ‘전국한글축제’ 감이지만 엉뚱한 곳에서 티격태격하느라 이것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아니, ‘한글축제’, ‘목판 복각사업’은 고사하고 번듯한 ‘한글탑’ 하나 만들어 랜드마크를 삼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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