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67] 장수면 갈산3리 ‘갈미’

갈미마을 전경

병자호란 때 한양인 조관(趙貫)이 입향 세거
사행 후손들이 실천한 효행사례 시대의 귀감

장수면 갈미 가는 길
갈미는 장수조이월드 인근 장수송어횟집이 있는 마을이다. 장수 IC사거리에서 감천으로 가는 길을 따라 벗고개를 넘으면 도로 우측에 ‘갈산3리 갈미’ 표석이 나온다.

표석 따라 우회전하면 넓은 들이 나타나는데 저쪽 산자락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마을이 ‘갈미’다.

지난 10일 오후 갈미에 갔다. 경로회관에서 송귀익 이장, 조승창 노인회장, 송종항 노인회총무, 송경익 전 노인회장, 김명순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옛 선비들이 남긴 효(孝) 흔적을 둘러보고 왔다.

갈미마을 표석

역사 속의 갈미(갈뫼)
갈산리는 1413년(태종 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서면(西面)에 속해 있었다. 조선 중기 무렵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영천군 두전리(豆田里) 갈산방(葛山坊)이라 부르다가 영조 이후 면리(面里)로 바뀌면서 두전면 갈산리가 됐다.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두전면 갈산동이 됐다.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두전면과 호문면을 병합하여 장수면을 새로 만들었다. 이 때 갈산리는 영주군 장수면 갈산리가 됐고, 해방 전후 무렵 갈산3리로 분리됐다.

송귀익(65) 이장은 “갈산리는 성산(城山)을 중심으로 사방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남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 갈미의 원조 우리 마을”이라며 “갈미 출신으로 송태환 변호사, 문예박사 송재수, 송인건 영주향교 전교 및 장수면장, 송봉익 면장, 송관익 교장, 송남선 교장, 송노익 교장, 송유익 서기관, 송홍한 동아대교수 등 각계각층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고 말했다.

체락정

지명유래
갈산리 중심에 있는 성산(城山)은 옛적 갈산성(葛山城)에서 유래됐다. 이 성은 삼국시대 초 삼국이 격전할 때 신라가 축조한 성으로 나온다. 1414년 조선 초 문헌에 ‘영천군에 갈산성이 있다’고 나온다. 또 임진왜란 때 의병이 갈산성에서 활동한 기록도 보인다.

갈산은 칡+뫼에서 유래됐다. 칡 갈(葛)자의 음(音) 갈(葛)자에 뫼 산(山)자의 훈(訓) 뫼자를 조합하여 ‘갈뫼’로 부르다가 발음하기 쉽게 ‘갈미’가 됐다.

한양조씨가 마을에 정착해 살 때는 갈산의 꼬리부분에 있다 하여 갈미(葛尾)라 불렀고, 야성송씨가 입향한 후에는 갈미(葛味)로 썼다. 옛 사람들은 ‘갈미’로 널리 통용됐고, 선비들이 한자로 기록할 때는 갈미(葛尾) 또는 갈미(葛味)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 백순기(89) 할머니는 “갈미에는 마을이 많아 ‘열 두 갈미’라고도 한다”며 “그 중 본 갈미가 우리 마을”이라고 말했다.

모은공(재수) 효행비

한양조씨 입향 내력
영주시사에 보면 「갈미는 한양인 조관(1573-?)이 병자호란 때 입향하여 살다가 1698년 큰 수해를 당하는 바람에 안동부 감천현으로 이주했다」고 되어있다. 갈미에 입향한 회계(檜溪) 조관(趙貫)은 좌의정 연(涓)의 후손으로 영주로 낙향한 조종(趙琮)의 증손이다. 그리고 처부는 선성김씨 문절공(文節公.淡)의 현손 윤성(允誠)이다.

조관은 1606년(선조39) 식년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했다. 병자호란(1636년) 때 초야(갈미)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니 사람들은 그를 두고 숭정처사(崇禎處士)라 했다. 그는 사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으며, 그의 후손이 문과 6명, 진사 15명이 급제하여 명문가로 이름이 올랐다.

후손 조승창(80) 노인회장은 “회계 선조께서는 병자호란 때 갈미로 은거하여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셨다”면서 “그 후손들이 이곳에 살다가 병자년(1698) 수해 때 감천면 유동으로 이주했다. 후손 일부가 지금도 인근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갈미노인회관

야성송씨 갈미 입향
갈미의 야성송씨는 시조 맹영(孟英) 下, 현령공(14세.綸)파 下, 영주 입향조 눌재(訥齎) 송석충(宋碩忠.15세) 下, 겸재공(謙齋公.18세)파 下, 계석공(啓錫公,24세)·사행공(思行公.24세)의 후손들이다. 계석공은 영조 17년(1741) 신유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지낸 송심기(宋心基,23세,1714生)의 아들로 1750년경 도봉에서 갈미로 이거하여 야성송씨 갈미 입향조가 됐다. 또 사행의 후손 갈미 입향 내력은 다음과 같다. 「24세손 사행(1744-1792)은 갑기공(甲基公)의 3자로 소태재(小台嶺.현 한정교 남쪽 사일언덕)에서 태어났다. 이후 가래(佳川.두전4리)로 이거하여 유학(儒學)과 농업으로 살다가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행의 아들 삼형제(弘錄, 弘禎, 弘調)는 일문의 권유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래를 떠나 갈미로 이거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 때가 1810-1815년 사이다. 현재 갈미에는 홍록, 홍정, 홍조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후손 송종항(75.30세) 노인회총무는 “야성송씨가 이곳에 정착한지 어언 250년이 넘었다”며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현재 국내외에 200명 이상 살고 있다”고 말했다.

모은정

체락정과 모은공 효행비
마을회관에서 마을을 바라보니 송어회 옆에 삼면을 토석담장으로 두른 정자가 보인다. 논길을 따라 가까이 갔다. 정자는 체락정(체樂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정자 앞에 ‘문예박사야성송공재수효행비’가 있다.

체락정은 시조 맹영의 27세 규환, 태환, 영환 3형제분을 추모하기 위한 정자다.

세 분은 학식과 덕망뿐만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여 사림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 정자는 28세 재수(규환의 아들)의 주선으로 1933년 3형제분이 편히 쉬시는 곳이라는 뜻으로 ‘체락정’이라 편액했다.

체락(체樂)이란 산앵두꽃에서 유래한 형제간의 우애를 이르는 말로 고전 체악지정(체鄂之情)에서 따왔다고 한다. 체락정 뜰에 세워진 효행비문을 읽어봤다. 효행의 주인공은 체락정 건립을 주선했던 모은(慕隱) 재수(在洙)다.

「효자 재수는 부모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삼가고 순종했다. 선고께서 대소변을 감당치 못할 때 극진히 모셨다. 꿈에 신이 가르친 대로 행하니 신비의 약을 구해 효험을 얻었다.

성골 느티나무

사경에 이르렀을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수명을 연장하기도 했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장례 후 아침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3년동안 하루 세 번 묘소를 살폈다」는 등 극진한 효행이 감동이다.

비문 말미에 「2010년 진성 이유화가 짓고, 손자 경익·현손 준기가 세우다. 비문번역 송관익」이라고 새겼다.

갈미 사람들

갈미 사람들
갈미 사람들은 12일부터 2박3일동안 관광을 떠난다고 한다. 화목하고 생동감 넘치는 마을이다. 회관 앞에 건축기념비가 있다. 2010년 건립 당시 찬조자 113명 명단이 있다. 측면에 「역대회장 송인황·송인협·송경익·송홍식·송재식, 회장 조진갑, 추진위원장 송종항, 위원 이성호·장영덕·김도홍·송귀익」이라고 새겼다.

회관 앞 갈미쉼터에 잠시 일손을 멈춘 할머니들이 모였다. 이옥희(86) 할머니는 “일철이 아닐 때는 회관에 모여 밥도 해먹고 쉬고 윷놀이도 하면서 재미있게 지낸다”면서 “이렇게 좋은 회관을 마련해 주신 이장님과 노인회장님 그리고 행사 때마다 수고를 많이 하시는 부녀회장님께 고마움을 전한다”고 말했다.

김성희(82) 할머니는 “마을 회관을 지을 때나 체락정 행사가 있을 때는 객지에 나간 사람들도 모두 모여 우애와 친목을 다진다”며 “찬조하고 기부한 명단이 돌에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송갑출(80) 할머니는 “갈산3리에는 갈미, 옥산, 성골, 절골 등 작은 마을이 여럿 있다”며 “모두 합력하고 화합하여 살기 좋은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강봉순(76) 씨는 “갈미는 야성송씨 집성촌으로 앞뒤가 아재네 집이고 형님네 집”이라며 “선대로부터 효성이 지극한 마을”이라고 말했다. 옥산마을에서 송경원(90) 할머니를 만났다. 기둥에 조진철이란 문패와 6.25참전유공자패가 걸려 있다.

갈미쉼터

송 할머니는 “신축년(1961) 수해 때 새벽에 용머리가 터져 잠자는 아이들 깨워 뒷산으로 피난 갔다. 토담집은 무너지고 숟가락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방2칸 수해주택에서 살다보니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나설 때 땅콩을 한줌 쥐어주셨다. 체락정을 둘러보다 영주문화유산보존회원들을 만났다.

“문화재 답사차 왔다”고 했다. 바로 옆 송어횟집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와서 보니 김명순(54) 부녀회장이 횟집 사장이다. 김 회장은 “송어양식장을 시작한지 22년 됐다”면서 “이제 갈미 사람 다 됐다”고 했다. 회원들은 “깨끗한 물에서 자란 송어회가 쫄깃쫄깃하고 씹을수록 고소하다”며 “유기농 채소와 콩가루를 더하니 최고의 맛”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송어회식당

<장수면 갈산3리 갈미사람들>

송귀익 이장
조승창 노인회장
김명순 부녀회장
송경익 전 노인회장
송종항 노인회 총무
백순기 할머니
이옥희 할머니
김성희 할머니
송갑출 할머니
강봉순 씨
송경원 할머니
모은공(재수) 진경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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