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66] 이산면 내림2리 ‘안수구리’

골마전경

소고 사후 임구에 이산서원 이건·도림서당 설립
소고 후손·동생 동원공 후손 임구(林丘)에 세거

이산면 안수구리 가는 길
내림2리 안수구리는 석포교 남방 1.2km 지점 내성천변에 있다. 내림2리 경로회관 주변마을이 개상골(開上谷)이고, 골 안에 있다고 골마, 윗쪽에 있다고 웃마 그리고 개상골 동쪽에 녹수골(綠水谷)이 있다. 지난 3일 안수구리 마을에 갔다.

이날 경로회관에서 이용호 이장, 정흥교 노인회장, 김춘화 부녀회장, 김영창 6.25참전유공자회이산분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안수구리의 역사와 소고(嘯皐) 선생 이야기를 듣고 왔다.

웃마 전경

역사 속의 내림리(수구리)
내림리 지역은 1413년(태종 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동면(東面)에 속해 있었다. 조선 중기(170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영천군 임지면(林只面)에 속했으나 내림(內林)이라는 지명은 문헌에 보이지 않는다.

이산서원지(伊山書院誌)에 보면 이곳 지명이 임구동(林丘洞)으로 나오고, 소고문집(嘯皐文集)에도 임구(林丘)로 나온다. 그런데 도림서당지(道林書堂誌)에는 임고동(林皐洞)으로 쓰고 있고, 마을 시람들도 임고(林皐)로 쓰고 있다.

이상의 문헌에서 당시 이곳 지명이 ‘임구동’또는 ‘임고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말 (1896년, 고종33)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임지면(林只面) 내림리(內林里)가 됐다. 10여년 후 1906(고종43)년 정부의 월경지(越境地) 정리 때 임지면(두월·내림·토일·설매·구천·가곡·창팔·고감 일원)이 봉화군으로 이관되는 바람에 내림리와 두월리도 봉화군 상운면에 속하게 됐다.

1973년 내림리·두월리 주민대표 송병찬(宋秉璨), 금교성(琴敎聲), 김우규(金佑奎) 등의 진정으로 영주군 이산면에 복귀됐다. 그 후 1980년 영풍군 이산면 내림2리, 1995년 영주시 이산면 내림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상골

지명유래
내림리는 속칭 ‘수구리’다. ‘내림리(內林里)’란 지명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6년 행정구역 개편 때다.

옛 문헌에는 임구(林丘) 또는 임고(林皐)로 나오는데 뜻은 같다. 이 마을 김영창(88) 회장은 “옛 지명이 ‘임고(林고)’로 전해 온다”면서 “칠성산 동쪽에 자리 잡은 임고촌은 산수(山水) 수려하고 나무가 울울창창(鬱鬱蒼蒼)하여 수풀 임(林)자에 언덕 고(皐)자를 써 ‘임고’라 부르다가 조선말 내림리(內林里)가 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럼 속칭 ‘수구리’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웃자고 하는 말로 ‘숙이다’의 뜻을 가진 ‘수구리’는 아니다. 영주시사에는 수구(水口)라 했고, 마을 사람들은 수구(水區) 또는 수곡(水曲)이라 했다.

이 마을 박정우(72) 씨는 “내성천 물줄기가 마을 앞으로 몰려왔다가 (무섬처럼) 마을을 휘감아 돌아 흐른다고 해서 수구리(水區里)라 했다는 구전이 전해온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지역 출신 김 모(63) 씨는 “수구리는 물 수(水)에서 유래된 게 아니고, 옛 지명 임구(林丘)에서 유래됐다”며 “숲이 우거진 이곳을 임구(林丘) 또는 수구(樹丘)라 했는데 서민들 사이에서는 ‘수구리’ 로 널리 사용됐다. 그 후 ‘숲의 안쪽 마을’이란 뜻으로 내림리(內林里)가 됐다”고 말했다.

녹수마을

임구(林丘)에 잠든 소고 선생
내림2리 웃마로 올라가면 진사 박승진의 고우당(古愚堂)이 있고, 산자락에 소고 재사가 나온다. 산길로 접어들어 100m 가량 오르면 소고(嘯皐.1517-1586) 묘소에 닿는다. 묘의 둘레가 40여 걸음이나 될 정도로 엄청 큰 편이고, 묘비의 높이도 3m가량 된다. 묘소 뒤에 외조부 김만일(金萬鎰)의 묘가 있다.

아마도 외조부께서 외손자의 묏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묘 바로 뒤에 선생께서 타고 다니던 말(馬)의 묘가 있어 생전에 선생께서 말을 타고 죽령을 넘나들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묘비 앞에 섰다. 통정대부 사련원대사련지제 교박공지묘(通政大夫 司련院大司련知製 敎朴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정3품 벼슬을 지낸 영주의 대표 선비다. 소고 연보에 보면 「1586년(70세) 정월 6일 반곡(蟠谷)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다.

5월 병신일 고을 동쪽 임구(林丘) 태좌(兌坐)의 언덕에 장례를 모시다」라고 기록했다. 1월에 별세하고 5월에 장례했으니 장례 기간이 4개월 이상 걸렸다.

개상골에 사는 김광식(72) 씨는 “저의 숙부님 생전에 들은 이야기”라며 “‘소고 선생 사후 묘소 축조 작업이 시작 된지 한 달 만에 덜구소리가 났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광중을 깊고 넓게 축조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또 소고 연보에 장례식 광경이 나온다.

「원근의 조문객으로 가마(加麻·머리에 두른 둥근 테)한 사람이 수백명이나 됐다」라고 적은 것으로 봐서 조문객이 엄청 많았다는 것을 짐작하는 대목이다.

소고의 묘

이산서원 이건과 도림서당 설립
1558년 번천(蕃川.현 휴천1동 남간재) 언덕에 창건된 이산서원은 터가 습하여 1614년(광해6) 군의 동쪽 임구(林丘)에 있는 소고 묘소 근처로 이건하게 된다.

이때가 소고가 세상을 떠난 지 28년째 되던 해다. 소고가 황해도 관찰사(1572)로 있을 때 ‘퇴계의 성학십도 등 발간을 위해 그 경비를 영천군수 허충길에게 보내 이산서원에서 발간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이산서원지에 나온다.

당시 장수희, 김륵, 박록, 김개국, 김융, 이개립, 이덕홍 등 이름난 선비들이 여기서 공부했다고 이산서원지 입원록에 적혀 있다. 또 소고의 장남 녹(1542-1632)은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묘소 지근(至近)에 도림서당을 건립한다.

선오당(善迂堂.간재 이덕홍의 아들) 이시(李蒔)가 쓴 상량문에 보면 「1625년 칠성산(七星山.현 박봉산주변) 아래 임구에 터를 잡아 박록을 중심으로 송상헌(宋常憲), 전이헌(全彛憲)등이 건물을 짓고 편액을 도림서당(道林書堂)이라 하고 학문성취와 덕행수련에 힘썼다」라고 적었다.

그 후 1872년(고종9년) 김박장(金박丈)이 갈마동(渴馬洞.두월뒷산)으로 이건하기까지 도림서당은 임구(안수구리)에 있었다.

원래 이 지역은 산림이 우거져 마을이 없었으나 이산서원을 이건하고 도림서당을 건립하고는 글을 숭상하는 마을이 됐다. 요즘으로 치면 인재양성 특구가 된 것이다.

이 무렵 소고의 아들 녹과 손자 회무(檜茂.1575-1666)는 도림서당 유사로 있으면서 임구에 우거(寓居)하게 된다. 그 후 소고 후손 일부와 소고의 동생 동원군 후손 일족이 임구에 살기 시작하여 지금도 6가구가 살고 있다.

안수구리 사람들

안수구리 사람들
내림리 지역은 영주댐 수몰지역에 포함되어 마을 개척 이후 최대 변화를 맞았다. 이용호(44) 이장은 “우리 마을은 1970년대 초까지는 65가구에 500여 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으나 산업화(1970-80년) 때 도시로 많이 나갔고, 또 최근 영주댐 수몰로 고향을 떠난 사람이 많아 현재 20여 가구에 35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정흥교(69) 노인회장은 “영주댐 수몰지역 최상류에 위치한 본동은 마을 개척 이후 큰 변화와 발전 기회를 갖게 됐다”면서 “조상 대대로 이어온 농토는 수몰되고, 이웃은 떠나 마을이 축소됐으나 도로의 신설과 현대식 주택이 들어서고, 귀농자도 차츰 늘어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어릴 적 내성천 모래사장에서 친구들과 놀던 때가 생각난다”는 이상호(70)씨는 “반짝이는 모래는 어디로 가고 잡초만 무성한 내성천으로 변해 보기 흉하다”고 말했다.

이원만(59) 청년회장은 “지금 농촌은 6-70대가 청년”이라며 “예전에는 벼농사 중심 농업이 많았으나 지금은 수박, 고추, 깨 등 밭작물 중심 농업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강병호(58) 씨가 포도를 한 상자 들고 와서 모두 함께 나누어 먹었다. 강 씨는 “영주댐 수몰로 개상들이 늪지로 변해 안타깝다”며 “마을 앞 삼각지 (연꽃) 연못 조성과 늪지를 수중생물 관찰지로 가꾸는 등 새마을정신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내림2리 경로회관

회관에서 나와 골마와 웃마를 한 바퀴 돌아 녹수골에 갔다. 녹수골은 내성천 물빛이 녹색으로 보인다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녹수골에서 정의식(65) 전 이장 부부를 만났다. 부인 김춘화(58) 씨는 마을 부녀회장이다. 마을 사람들은 “두 부부가 마을을 위해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고 칭송한다.

이 집 마루에 앉아 내성천이 내려다보면서 옛날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의식(65) 씨는 “어릴 적 보릿고개 때 어머니가 해 주신 수꾸풀데기를 먹고 자랐다”면서 “그 때는 먹기 싫었던 음식이 요즘은 별식이 됐다. 보릿고개 세대가 아니면 배고픈 서러움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인 김춘화 씨는 “마을 앞 개상들과 강건너 번계들이 잡초만 무성해 보기 흉하다”며 “늪지 공원 조성이나 수중생물원 등 시민들의 휴식 공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씨는 또 “전 국가대표 배구선수 정의탁 선수가 우리 녹수골 출신”이라고 자랑했다.

소고선생이 잠든 임구의 언덕
옛 소고 재사
진사 박승진의 고우당

이원식 시민기자

<이산면 내림2리 안수구리 마을사람들>

이용호 이장
정흥교 노인회장
김춘화 부녀회장
정의식 전 이장
김영창 6.25유공회장
박정우 씨
김광식 씨
이상호 씨
이원만 청년회장
강병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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