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 최상호(시조시인, 본지 논설위원)

백세 시대를 살아가게 된 우리는 나이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를 맞았다. 필자가 교직 초년병이던 1970년대에는 불혹이면 어른 대접을 받았다.

지천명이면 거의가 교감을 바라보았고, 환갑 즈음에 교장으로 승진해서 교직의 꽃으로서 매우 권위적인 태도로 살아갔다. 어쩌다가 교직 정년이 단축된 뒤부터는 불혹에 전문직으로 탈출함으로써 조기 승진이 이뤄졌고, 중임제가 시작되어 사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옛 동료들은 모두 정년퇴임했고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여생을 즐기고 산다. 그러나 신체 나이나 건강 나이가 향상되면서 인간으로서의 수명이 늘어나게 되자 고령화 사회, 빈부격차, 남녀평등에 청년실업 문제가 등장했고 정치적인 혼란이 노사갈등과 경제민주화 문제로까지 이어져서 뭐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일조차 힘들어졌다.

남북대치 상황은 오늘도 극한이고, 여러 참사를 겪으면서도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불편함 속에 새 시대를 맞았다. 여태껏 살면서 이만한 큰 사건 사고를 연달아 겪으면서 마침표 찍는 날까지 행복하게 목숨껏 살기가 불안하다. 어떻게 현실적인 불안을 줄이고 살아가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 것이다.

중년기에 접어든 사람은 어떤 경로로든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와 맞닥뜨린다. 하는 일(직업)을 정체성과 같은 값으로 여기는 남자들에게 그것은 실존의 뿌리를 흔드는 경험이 된다. 그때 남자들의 대응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짐 콘웨이는 말했다.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에 몰입하는 유형, 경쟁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조직에 이용당했다고 여기며 일을 접는 유형, 다른 직업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꿈꾸는 유형”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그 마음 안에는 실직의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고 한다. 오래 살아야 하는데 뭐를 해서 먹을 것이며 행복하다고 믿는 삶을 이을 것인지 두려워한단 것이다.

심리학 이론상으로는 중년기 들어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가 일 때는 우선 마음을 점검해야 한다.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바로 그 허탈감을 들여다봐야 한다. 자기 정체성은 직업과 등가가 아니다. 인정받기 위해 일했기에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고, 경쟁심에 쫓기느라 일의 진짜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음을 이해해야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게 허무하다.

40년 넘는 직업에서 은퇴한 선배가 새해 일출을 보며 갈등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들에게 물려 준 사업 번창을 빌까, 가족들의 건강을 빌까?” 하나를 빌고 나자 또 다른 소망이 일어나더란다. 모든 게 욕심인 줄 알면서도 버릴 것이 없더란 고백이 짠했다.

“중년기 이후 심리적 문제는 종교적 성향을 갖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은 철학자 융의 말이다. 종교적 성향이란 사랑과 자비심을 뜻할 것이다. “중년기 남자의 정체성 정립에는 양가성 통합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에릭 에릭슨의 말이 덧대어진다.

일손을 놓고도 사랑과 자비심을 간직한다는 것은 실로 어렵다. 들어오는 것이 적어지거나 사라진다면 지갑을 닫거나 아예 주머니를 없애야 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모임의 숫자도 줄여야 하고, 바깥출입까지 삼가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서는 삶의 보람이나 의미를 찾기 힘들다.

특히 중년기 이후에는 창조성과 파괴성의 대립을 통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가 아니라 “이 일로써 무엇을 할 것인가” 쪽으로 마음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양심만은 지키고 산다고 속이며 산다. 지금 나의 처지와 형편은 모두 ‘남의 탓’이다. 나는 양심을 지키고 싶은데 주위가 그러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강변한다.

모두 분노와 복수심과 욕심에 빠져 있음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다. 남의 잘못이나 다름에 대해서 조금의 아량이나 여유도 없이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얻을 것인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반성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소통은 고사하고 개인의 기쁨이나 행복도 낙관할 수 없다.

오늘 나의 고뇌는 누구의 책임이 아니다.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여유와 만족을 갖고 하루하루를 축제와 같은 삶으로 채우려면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중년을 지난 우리는 외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어야 한다. 고령화 사회에서는 고희도 스스로의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중년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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