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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랑이 남다른 ‘은행정(銀杏亭)’ 사람들우리마을 탐방[165] 부석면 노곡1리 ‘은행정’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7.09.15 14:04
  • 호수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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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정 마을전경

옛날 배(裵) 부자가 살았다는 전설의 마을
애향심으로 세운 은행정기비·은행정·경
로당

부석면 은행정 가는 길
노곡1리 은행정은 단산면과 부석면 경계 지점에 있다. 단산면소재지에서 부석방향으로 향한다.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1.5km 쯤 가다보면 도로 오른쪽으로 아담한 정자 하나가 보이는데 이 정자가 은행정(銀杏亭)이다.

마을은 정자에서 200m 가량 들어가서 자리 잡았다. 천마산 산줄기가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아 ‘소쿠리형 명당터’라고 한다. 지난달 27일 은행정에 갔다.

이날 은행정경로당에서 정병한 노인회장, 김해수 초대 노인회장, 김제국 전 노인회장, 박종기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은행정의 내력을 듣고 왔다.

아름다운 은행정

역사 속의 노곡리(은행정)
고구려 장수왕(재위:413-491) 무렵 부석지역은 고구려의 영토 ‘이벌지현(伊伐支縣)’이라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통일신라 때는 인풍현(인豊縣)으로 고쳐 급산군(옛 순흥)에 예속됐다. 고려 초에는 흥주·순정(옛 순흥)에 속했다가 안동부에 속하기도 했으며, 고려 말 순흥부 산하가 됐다. 조선 태종13년(1413) 순흥도호부에 속했다가 조선 중기 행정구역 정비 때 삼부석면(三浮石面) 호문단리(好文丹里)에 편입됐다.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순흥도호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삼부석면은 봉양면(鳳陽面)으로 개칭됐다. 이 때 호문단리는 상호문리과 하호문리(下好文里)로 분리됐다. 1914년 일제 때 상호문리와 하호문리가 노곡리로 통합되었다가 해방 후 노곡1,2리로 분리됐다. 은행정은 호문단-하호문-노곡1리로 변천했다.

지명유래
마을 이름이 언제부터 ‘은행정’이 됐는지 궁금하다. 김해수(90) 초대 노인회장은 “문헌에도 없고 구전도 미약하여 알 길이 없으나 마을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은행정’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고목 은행나무 옛 터

정병한(83) 노인회장은 “제 선고(先考)께서 1901년생이신데 생전에 ‘동구에 수령 500년가량 되는 고목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객지에 나갔다가 (1920년) 돌아와 보니 없어졌더라’고 말씀하셨다”면서 “이를 애석하게 여긴 故 김태용 선생이 1926년 그 자리에 느티나무 1그루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2013년 고사하여 2017년 4월 그 자리에 은행나무 1그루(20년생, 유득수 이장 건의 장태영 면장 지원)를 다시 심었다”고 말했다.

김제국(88) 전 노인회장은 “구전에 의하면 ‘아주 옛날 배(裵)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면서 “고사한 은행나무는 배 부자가 입향할 때 심은 나무로 추정되며, 당시 은행나무 아래 ‘은행정란 정자가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수만의 은앙쟁이

그럼 ‘노곡’이란 지명은 언제 생겼을까? 송지향의 향토지에 보면 「옛 노실(魯室)에 노원(魯園) 김철수(金喆銖.1822~1887)란 선비가 우거(寓居)하면서 글 읽기에 전념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김철수는 노실에 살면서 호를 노원이라 했다.

일제 초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곳 선비들이 노원의 노(魯)자를 따 노곡(魯谷)이라 이름 지었다. 김철수는 봉화 바래미(海底) 출신으로 의성김씨 해저문중 개암공(開巖公.1524-1590)의 10세손이다.

186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 있을 때 1871년(고종8) 서원훼철에 분개하여 유건을 벗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숨어 살면서 독서와 저술로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가 숨어 산 곳이 바로 노실(魯室)이다.

이 무렵(1963년) 김해수 청년회장을 중심으로 정병한·남상주 등이 앞장서 ‘저축계’를 조직하여 경제적인 어려움(빚)을 극복하도록 하는 한편 농촌진흥청 농촌지도자 교육을 받고 와서 농사개량사업, 생활개선사업 등을 적극 추진했다.

농촌계몽의 선구자
1960년대 후반까지도 농촌은 식량 부족으로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모이면 “먹고보자”라는 그릇된 생각으로 그저먹기, 노름(두장무이, 짓고땡) 등으로 생활은 더욱 피폐(疲弊)해졌다.

정병한 노인회장은 “당시 20여 가구가 저축계를 조직하여 쌀 1말씩 거두니 쌀 2가마 반 이었다”며 “빚진 사람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해마다 이식(利殖)을 낮추었더니 10년 후에는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또 70년대 군이 주최하는 농업경진대회에 나가 농사개량구락부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었다. 이러한 결과는 동민단합의 계기가 되었고, 잘 사는 농촌의 기반이 됐다”고 말했다.

은행정 정자

비(碑)를 세우고 정자를 짓다
고향을 지극히도 사랑하는 은행정 사람들은 1998년 은행정 유래비를 세우고, 1999년 정자를 직접 지었다. 은행정기에 보면 「은행나무 한 그루가 동구에 있어 ‘은행정’이라 불렀다. 그 나무가 고사하자 김태용 씨가 느티나무를 심었다.

은행정기 비(碑)

옛 행목(杏木)에 대한 그리움에 1966년 권오덕 씨가 희사한 행목 2수를 마을 초입에 심었다. 동민과 출향인들의 뜨거운 애향심을 담아 이 비를 세운다. 기문을 쓴 김응한 백남문화연구원장은 ‘친구 정병한이 청함에 보고 들은 바를 기록했다’」고 새겼다.

전하봉 씨

은행정 정자는 마을 사람들과 출향인들의 정성과 손길로 지은 정자다. 이 마을 출신 전하봉(70) 씨는 “이 정자는 김해수·김제국·정병한·박종기·권영철 선배님을 중심으로 직접 설계하고, 산에서 기둥과 서까래를 구하고 톱으로 자르고 대패질하여 세운 정자”라며 “마을 부녀회에서는 식사·새참 준비를 도맡았고, 출향인들은 성금을 모아 힘을 보탰다”고 말했다.

박종기(88) 어르신은 “이 정자는 나그네 쉼터로 개방하고 있다”며 “가족단위 친구끼리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면서 친교하는 좋은 정자”라고 말했다.

은행정 경로당

새마을정신으로 지은 경로당
마을의 형세를 키(箕.곡식 까부는 연장)에 비유할 때 알곡이 모이는 자리에 경로당을 건립했다. 경로당 마당에 서니 은행정경로당(글씨 김동호) 현판과 희락유정(글씨 진병인) 현판이 돋보인다.

1950년 은행정서당 학동들

1920-50년대 아동어른(朴用煥.한학자)께서 서당을 열었다고 전해지는데… 선비의 마을에 온듯한 느낌이다. 경로당 앞 준공기념비에 「마을의 숙원인 현대식 경로당 신축 때 협찬해 주신 출향인과 동민들의 이름을 여기 새겨 그 애향심을 경로당과 함께 영원히 기억하고자 한다.

노인회장 김복진, 추진위원장 김해수, 부위원장 남상호, 총무 김제국, 위원 이철주·박종기·권영철·정병한·권영선·권석준, 2007.12.28」이라고 새겼다. 기념비에는 123명의 기부자 명단이 있다. 본동은 19명뿐이고 104명이 출향인이다.

경로당 준공 기념비

여느 마을과 달리 ‘출향인들의 애향심이 돋보이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제복(73) 노인회 총무는 3년전 귀농하여 들었다면서 “김제국 추진위 총무님께서는 시공에서 준공까지 직접 사진을 찍고 출력하여 기록으로 남기셨다”며 “은행정 어르신들은 90이 가까운 연세에도 컴퓨터 활용능력이 대단하시다”고 말했다.

은행정 마을사람들

은행정 사람들
은행정노인정은 넓고 깨끗하다. 안방에서는 윷노는 소리로 왁자하고 사랑방에선 또닥토닥 바둑 두는 소리가 난다. 10년 전 귀향했다는 김사록(87) 어르신은 “어릴 적 놀던 고향이 그리워 귀촌했다”면서 “내고향 은행정은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힐링 마을”이라고 자랑했다.

김사록 씨

출향인 김수만 씨는 「삼베 짜던 어매와 늙은 할매를 두고 고향을 떠나…, 만신창 갈라진 누더기일지라도 반가이 맞아 줄 고향 은앙쟁이에 살고 지고」라며 2007년 그리움을 돌에 새겼다.

안방에서 연세가 제일 높으신 한일순(82) 할머니는 “우리 경로당은 365일 항상 문이 열려 있고 누구나 내 집같이 소중히 여긴다”면서 “100원씩 대고 편 갈라 윷놀이 하는 재미가 짭짤하다”고 말했다.

김숙자(82) 할머니는 “새댁시절 하루 종일 물이는 게 일이었는데 물버지기를 이고 좁은 언덕길을 어떻게 다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고 하면서 “지금은 참 편리하고 좋은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단산 안남에서 은행정으로 시집 왔다는 권경화(80) 할머니는 “예전에 보릿고개를 넘을 때는 보리가 익기도 전에 이삭을 따 볶은 다음 껍질을 벗겨 보리밥을 해먹었다. 또 부석장에서 아이들 주려고 아이스케키를 사 가지고 누런종이에 싸서 집으로 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 다 녹아 버려 황당하고 애통했었다”며 보릿고개 이야기를 들려줬다.

봉화 두문에서 19살 때 시집왔다는 송영근(79) 할머니는 “예전에 호랑불 켜고 외나무다리 건너다닐 때는 집도 많고 아이들도 많았다”면서 “그 때는 보리밥도 배불리 못 먹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볍씨를 보급하여 쌀밥 먹고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부석 사그레이가 친정이라는 황재옥(75) 씨는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살았는데 ‘어머니 세대와 할머니 세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며 “지금은 살기좋은 마을에 출향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이 북적이는 마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로당에서 나와 정병한 회장과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정 회장은 “출향인들이 속속 귀향하여 노후를 고향에서 보내는 멋진 그날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부석면 노곡1리 은행정 마을 사람들>

정병한 노인회장
김해수 초대 노인회장
김제국 전 노인회장
박종기 어르신
김제복 노인회 총무
한일순 할머니
김숙자 할머니
권경화 할머니
송영근 씨
황재옥 씨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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