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九는 동양에서 가장 큰 숫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아홉 물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구곡(九曲)은 물줄기가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이나 계곡 가운데 가장 경치가 좋은 명승 아홉 곳을 선정한 것이다.

구곡문화는 지금부터 1000년여 전 중국 송나라의 주자(朱子=朱熹)가 복건성 무이산(武夷山) 발치에 있는 무이천(武夷川)의 절경 아홉 굽이에 설정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름하여 무이구곡(武夷九曲)이다.

그는 무이구곡의 중간쯤 되는 제5곡에 정자를 짓고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썼다.

이 「무이구곡도가」는 무이산 아홉 구비의 절경을 읊은 시로, 첫 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이구곡의 절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자연묘사를 주로 하면서도 도학(道學)을 공부하는 단계적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학설을 신봉했던 조선조 유학자들은 여기 무이구곡을 본받아 그들이 거처하던 곳의 경관을 이상세계로 간주하고 경치 좋은 아홉 군데를 설정하여 구곡을 경영하였다.

물야의 산운마을 앞에위치한 오계2곡(우록대)

이러한 구곡문화는 조선후기에 와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율곡의 고산구곡(高山九曲)을 필두로 퇴계의 도산구곡(陶山九曲), 송시열의 화양구곡(華陽九曲)등이 우리나라 구곡문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곡문화는 창달한 중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욱 흥성하였는데, 이른바 세계에서 최고 최다의 구곡문화를 이루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이후 구곡은 ‘팔경’이라는 경관과 더불어 세계 2대 산수문화를 만들어냈다.

구곡은 ‘주역(周易)’의 구오(九五) 원리를 적용한 것이라 한다. 구오는 만물이 각각 그 기능과 역할을 다하여 원만하고 활발하게 작용함으로써 천하를 으뜸으로 잘 다스려지게 하는 상황을 표현한 괘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구곡을 설정한 것은 천하가 순리대로 원만하게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기원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태평성대를 희구하는 정치관을 자연에 표상화 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또 팔경이 면(面)으로 구축된 문화임에 비하여, 구곡은 계곡 하류부터 상류사이에 선(線)으로 구축된 문화이다.

또한 구곡은 학맥 학파를 응집시키며 학통을 계승하는 구심점으로 정립되기도 하였다. 이의 연원을 청소년 인성교육의 발판으로 삼을 필요도 있지 않을까?

자연경관이 빼어난 봉화에는 자연히 구곡문화도 활발하여 현재 구곡원림 6개가 산재하는데, 오계구곡(梧溪九曲), 갈산구곡(葛山九曲), 법계구곡(法溪九曲), 대명산구곡(大明山九曲), 춘양구곡(春陽九曲), 광진구곡(光津九曲)이 그것이다.

모두 조선후기의 구곡인데, 그 중에서도 오계구곡이 가장 먼저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오계구곡은 노봉 김정(蘆峰 金政)이 물야면 오록계곡 일대에서 경영하던 구곡이다.

갈산구곡은 갈천 김희주(葛川 金熙周)의 구곡으로, 명호면과 재산면 갈천정 일대가 중심이다. 법계구곡과 대명산구곡은 해은 강필효(海隱 姜必孝)가 경영한 구곡으로 법계구곡은 법전면 일대, 대명산구곡은 명호면과 안동 도산면 일대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춘양구곡은 경암 이한응(敬菴 李漢應)이 춘양면과 법전면에 걸쳐서 흐르는 운곡천의 승경 아홉 구비에 설정하였다. 근대에 들어서는 정형(鄭瀅)이 물야면 북지리에서 오전리까지의 구역을 설정하여 광진구곡(光津九曲)이란 이름으로 경영하였다.

이렇게 곡(曲)은 굽이라는 뜻으로 산이나 물줄기가 굽이진 곳을 말하며, 노래라는 뜻도 동시에 가지고 있어 구곡을 개척한 유학자들의 구곡가(九曲歌)에 해당하는 한시(漢詩)들이 동시에 전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오계구곡도 우산곡(愚山曲), 고도곡(古渡曲), 진의곡(振衣曲), 예암곡(豫巖曲), 송정곡(松亭曲), 분포곡(汾浦曲), 하담곡(下潭曲), 중담곡(中潭曲), 상담곡(上潭曲) 순으로 만석산과 천석산 사이를 빠져나가는 오록 입구를 시작으로 오전리 입구의 신담(薪潭)까지에 9곡을 배치해 노래하고 있다.

다음은 노봉의 오계구곡 서장이다.

梧溪山水蘊奇靈 (오계산수온기령)-오록계곡 산수는 기이하고 신령함이 숨어있고,
曲曲風光진幽絶 (곡곡풍광진유절)-굽이굽이 진 풍광은 멋 그윽한 절경이다
山自高高水自淸 (산자고고수자청)-산은 스스로 높디높고 물은 절로 맑았구나
漁歌唱晩動新聲 (어가창만동신성)-어부들의 으스름 노래 소리 메아리쳐 들리네.

노봉 김정은 숙종 34년 문과에 급제,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이 되었고, 그 뒤 사헌부감찰, 함경도도사, 병조정랑, 옥천군수, 강릉부사,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양역의 여러 가지 폐단을 개선하는 등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을 많이 남긴 청백리이다.

그가 제주에서 씨를 가져다 심은 제주솔은 지금 창말 입구에 무성하여 물야초등학교가 ‘전국 아름다운학교 숲’ 대상을 수상하도록 큰 공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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