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61] 풍기읍 미곡리 ‘메끼실’

안메끼실 전경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고려 충신 은거지
지금, 몸과 맘 편히 쉴 수 있는 힐링촌

풍기읍 메끼실 가는 길
풍기 메끼실은 금계의 동쪽, 죽계의 서쪽에 자리 잡은 십승지 마을 중 하나다. 풍기읍에서 소백로를 따라 순흥 방향으로 간다. 광복단-동양대삼거리-선비골인삼시장을 지나 돌고개를 넘으면 좌우가 모두 미곡리다. 도로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신설 4차선 도로 첫 번째 좌회전 길로 800m쯤 들어가면 ‘바깥메끼실’이고, 두 번째 좌회전 길로 들어서면 도로변에 있는 마을이 ‘거리메끼실’이고, 1.2km 가량 올라가면 ‘안메끼실’이 나온다. 지난달 22일은 안메끼실에, 23일은 바깥메끼실에 가서 미곡리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미곡리 표석

역사 속의 미곡리
풍기는 신라가 죽령을 넘어 고구려로 북진하기 위한 전초기지(前哨基地) 기목진(基木鎭.풍기의 옛 이름)을 설치한데서 비롯됐다.

고려 때는 기주현(基州縣)이라 불렀고,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기천현(基川縣)으로 고쳤다.

이 무렵 1414년 문종(세종의 아들)의 태를 은풍 명봉산(鳴鳳山)에 묻었는데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태(胎)를 묻은 보상으로 은풍(殷豊)의 풍(豊)자와 기천(基川)의 기(基)자를 따 ‘풍기(豊基)’라 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1700년경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풍기군 동부리(東部里) 미곡방(味谷坊)이라 부르다가 180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풍기군 동부면 미곡리(味谷里)가 됐다.

그 후 1896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풍기군 동부면 미곡리가 됐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풍기면 ‘미곡리’가 됐다.

바깥메끼실 전경

미곡리와 메끼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미곡리(메끼실)’이란 표석이 있다. 행정구역 상 ‘미곡리’이고 속칭 ‘메끼실’이란 뜻이다.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편에 보면 예쁜마을이름 ‘메끼실’이 나온다. 송지향의 영주영풍향토지에는 메끼실이라 했고, 다음지도에는 맥기실로, 네이버 지도에는 메끼실로 나온다.

김우식(67) 이장은 “미곡리는 안메끼실, 바깥메끼실, 거리메끼실 등 3개 마을 50여 가구에 100여명이 산다”며 “아주 옛날에는 피난처로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몸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힐링촌이 됐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미곡(味谷)이라 했는지?’ 어디에 찾아봐도 답이 없다. 풍기읍지에 보면 “예로부터 ‘미곡리’로 되어 있다”라고 했다. 미곡의 미자는 ‘맛 미(味)’자다. 미(未)는 나무[木]에 가지[一]가 붙어 미래 미[未]자가 됐다가 그 앞에 입 구(口)자가 붙어 맛 미(味)가 됐다.

예로부터 미곡리에서 나는 쌀이 밥맛이 좋아 군(郡) 전체가 미곡볍씨로 벼농사를 지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혹시나 ‘밥맛이 미곡(味谷)의 어원이 된 것은 아닌지?’ 추정해 볼 뿐이다.

안메끼실 사람들

지명유래
‘메끼실!’ 참 아름다운 이름이다. “메끼실은 어디에서 유래 됐느냐?”라는 질문에 김선호 노인회장은 “마을 뒤에 ‘모직봉(모이봉)’과 ‘둥지리봉’이 있고, 그 앞에 노인봉이 있다”면서 “노인봉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둥지리와 모이가 있으니 ‘닭 기르기 좋은 곳’이라 하여 칠 목(牧)자에 닭 계(鷄)자를 써 목계실(牧鷄室)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목기실, 막끼실, 메끼실로 발음이 변했다”고 말했다.

바깥메끼실 김재찬 노인회장은 “도솔봉(兜率峯)의 독수리가 닭밭두들(금계리)의 닭을 노리고 있을 때 노인봉(老人峯)의 노인이 긴 막대기(잠배재)로 독수리를 쫓아 닭을 보호했다는 전설이 있다”며 “노인이 이곳에서 ‘양계(養鷄)하기 좋은 땅’이라 하여 ‘목계실(牧鷄室)’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나중에 발음이 변해 ‘메끼실’이 됐다”고 말했다.

바깥메끼실 사람들

십승지의 원조 메끼실(牧鷄)
십승지란 숨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땅으로 전쟁이 나도 안전하고, 흉년이 들지 않고, 전염병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을 의미한다. 풍기 금계동 주변에 정감록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 6.25까지다.

그런데 그 보다 500년 앞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충신들이 “충신은�두�임금을�섬기지�않는다(不事二君)”며 벼슬을 버리고 소백산 깊은 산속에 은둔하니 그곳이 바로 ‘메끼실’이다.

지역 사학자들은 “아마도 당시 왕씨(王氏) 일족이 성을 바꾸어 이곳에 은둔했다가 다른 곳으로 이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 능덕리에 살다가 7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정착한 문택근(80) 어르신은 “당시 북한에서는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이 떠돌아 이곳에 오게 됐다”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소백산 주봉에서 흘러나온 두 물줄기 죽계(竹溪)와 금계(金溪) 사이에 있는 목계(메끼실)가 1승지 중 으뜸’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풍기읍지에 보면 “고려왕실 고관대작들이 이곳에 피난 와서 살았는데 산적들의 습격을 많이 받아 폐동 됐다가 300여 년 전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적혀있다.

60년대 거리메끼실 풍경

궁전같은 안메끼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지만 안은 넓다. 마을회관에 동네사람들이 다 모였다. 중복(中伏)달임 행사를 연다고 한다.

김순자 부녀회장과 회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복달임 준비를 하고 있다. 김선호 노인회장은 손님을 맞는다. 전영탁 시의원과 서동석 풍기농협장 등 기관단체장들도 복달임 음식을 함께 했다.

박헌구(84) 어르신은 “선조들은 복날 그해 더위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고깃국을 먹었다”면서 “우리 메끼실은 선조들이 남기신 고유 전통과 민속신앙을 잘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선호 회장은 “안메끼실은 300여 년 전 경주김씨가 마을을 개척하고 광산김씨와 안동김씨가 정착하여 3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며 “1950-60년대에는 36호에 200명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16호에 30여명이 산다.

또 6.25 때는 풍기 사람들이 여기로 피난 와서 한 지붕 세네가정이 피난살이를 했다”고 말했다. 김옥순(82) 할머니는 “마을은 작지만 단합이 잘 되고 늘 화기애애한 마을”이라며 “든든한 김우식 이장님과 마을을 이끄는 김선호 회장님, 그리고 어렵고 힘든 일도 척척 잘 해내는 김순자 부녀회장이 있어 늘 웃음 넘치는 행복마을”이라고 말했다. 회관에서 나와 김선구 씨와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앞산고개 방향으로 갔더니 황헌의 묘가 있었다. 황헌(黃憲.874-1971)은 욱금에서 태어나 1892년(고종29)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 등 관직을 지낸 선비다.

다음은 약샘으로 갔다.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펑펑 솟아나온다. 김선구(69) 씨는 “안메끼실은 물이 풍부해서 가뭄을 모르고 산다”며 “고려 말 피난처가 되었다는 것은 물이 풍부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목계정

바깥메끼실 목계정(牧鷄亭)
도로변에서 산모롱이를 하나 둘 돌아서니 마을이 보인다. 회관 앞에 정차하고 정자에 올라 마을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김재찬 노인회장은 현판을 가리키며 “메끼실의 역사가 ‘목계’에서 시작되어 ‘목계정(牧鷄亭)’이라 이름지었다”면서 “300여년전 흥해배씨가 마을을 개척하고 안동권씨 등 여러 성씨가 살았으며, 1944년경 북한에서 이주한 정감록파 5가구가 이곳에 정착했다”고 말했다.

박형래(85) 어르신은 “목계정은 2013년 당시 황찬명 이장이 쉼터지원사업을 신청하여 1천만원의 시비를 지원받아 세웠으며, 김재찬 노인회장이 ‘목계정’이라 이름지었다. 또 미곡경로당은 2000년 당시 김재찬 이장이 시(市)의 지원금과 주민들의 협찬으로 건립했다”고 말했다.

회관 안으로 들어가 봤다. 둘러앉은 방석에 10원짜리 동전이 수북하다. 배귀분(75) 씨는 “우리마을은 꽃방 안 같이 포근하고 잠이 편안한 마을”이라며 “여기에 오면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자연과 좋은 이웃이 있다“고 말했다.

안메끼실 약샘

18살 때 문수 다락골에서 메끼실로 시집왔다는 김송자(78) 할머니는 “초가삼간에서 보릿고개를 넘으며 살았지만 사람들은 늘 활기차고 넉넉했던 것 같다”면서 “지금은 김재찬 노인회장님 내외분과 황찬명 전 이장님 내외분의 주선으로 마을이 늘 화목하고 다복하다”고 말했다.

회관에서 나와 황찬명 전 이장과 마을을 둘러봤다. 황 전 이장은 흙냄새 나는 골목길, 동샘과 빨래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성황단 등을 안내하고 나서 “남서쪽 산 너머에 등두들과 금계촌이 있고, 북동쪽 방향으로 뒷골, 안메끼실이 있다”면서 “이곳은 십승지의 조건을 잘 갖춘 명당 터”라고 말했다.

황헌의 묘
바깥메끼실 성황당

<풍기읍 미곡리 메끼실 사람들>

김우식 이장
김선호 안메끼실노인회장
김재찬 바깥메끼실노인회장
김순자 안메끼실부녀회장
박형래 어르신
박헌구 어르신
김옥순 할머니
문택근 어르신
김송자 씨
배귀분 여성회장
김선구 씨
황찬명 전 이장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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