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시인·문학박사)

해방이 되자 온갖 정치세력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좌익과 우익이 있었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있었다.

심산은 오로지 민족의 독립국가 건설에만 관심이 있었다. 좌익도 아니요 우익도 아니었다. 모든 이념을 초월한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는 어떤 외세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그의 선비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김구 등은 비상 국민회의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최고정무위원회의를 만들었다. 우리민족끼리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다.

이 기구가 갑자기 미군정청장의 자문기구로 바뀌었다. 정무위원회의 의장 이승만이 꾸민 일이었다. 이승만은 미군정청을 등에 업고 해방공간에서 유력자가 되었다. 심산이 이승만에 말했다.

“당신은 오늘 이미 민족을 팔았다. 어찌 다른 날에 국가를 팔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있겠는가? 어찌 그리도 비겁한가?”심산의 눈에 비친 이승만은 자기의 권력만을 추구하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았다. 선비들 사이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이 소인배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좌익이 돌연 찬탁으로 돌아섰다. 심산은 남로당 지도자들을 집으로 불렀다. 남로당 조직부장 이승엽 등이 왔다. 그들은 “미국이란 이리를 견제하려면 소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심산은 “저도 이리요 이도 이리다.

한 이리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이리를 끌어들이는 격이니 우리 한인은 두 이리의 이빨에 종자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며 그들을 나무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나고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승엽이 서울시 인민위원장이 되어 심산을 찾아와 방송에 내보낼 자수 성명서를 쓸 것을 요구하였다. 심산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 생사는 네 마음에 달렸으니 나를 쏘라. 나는 김일성을 지지할 수 없다.”

전쟁 중에도 이승만은 권력을 굳게 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수많은 정적들을 빨갱이로 몰아 제거하거나 암살했다. 수많은 청장년들이 굶어죽고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건, 각 지역의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심산은 ‘이승만 하야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승만에게 심산은 눈엣가시였다. 이후 부산 피난지에서 열린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하는 장소에 깡패들이 들이닥쳤다. 다리가 성한 조병옥, 장택상, 이시영 등은 도망갔으나 벽옹은 앉은뱅이라 도망가지 못해서 심한 폭행을 당했다.

정전 후에 심산은 ‘유도회’를 만들고 총재에 취임했고 성균관대학교를 세우고 총장이 되었다. 면우 곽종석이 조선조 마지막 선비였다면 심산은 공화국 최초의 선비라 할 수 있다. 이 땅에 선비정신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심산을 그냥 두지 않았다.

1957년 유도회와 성균관대학에서 심산을 쫓아내고 친일파를 집행부에 앉히고 기독교 장로인 자신이 유도회 대표가 되었다.

4.19혁명 이후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장으로 통일운동을 하다가 5.16 쿠데타로 그마저 무산되었다. 심산은 말년에 봉화 바래미에서 곤궁하게 사셨다는 증언이 있다. 선비정신을 말하는 자 마땅히 심산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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