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단양수몰이주기념관 마당에 있는 군수 황준량 선정비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처럼, 황준량의 상소문을 읽고도 눈물이 나지 않으면 목민관이 아니라고 한다.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농토는 본래 척박해서….

역사(役事)를 못하고 도망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까지 이웃에 책임을 분담시켜 부세를 징수하니 가혹한 세금은 다른 고을보다 몇 곱절이나 되어 가난한 자는 이미 곤궁해지고 곤궁한 자는 이미 병들어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농토와 마을을 버리고 이슬을 맞으며 산속에서 살다가 승냥이나 살무사에 물려 죽더라도 돌아오려 하지 않으니 온 고을이 폐허가 돼버렸습니다. 마을은 가시덤불로 덮이고 인가에 연기가 나지 않아 전쟁이 난 뒤보다 더 참혹하여 슬퍼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

금계는 1557년 가을에 자신의 고향과는 큰 산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 고을 단양군수가 된다. 막 부임한 단양고을을 살펴본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민폐는 감내할 수준을 넘었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거의 파산지경의 고을을 다시 일으키고자 임금에게 진폐소를 올렸는데, 이른바 황준량의 ‘민폐십조소(民弊十條疏)’이다.

이는 명종을 감동시킨 명문장으로 회자되며, 회재 이언적의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 퇴계 이황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남명 조식의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와 더불어 조선조 4대 상소문으로 꼽히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임금의 비위를 건드릴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소문을 금계는 과감히 올렸다. 그리고 단호했다. 군(郡)을 혁파하여서라도 아직 살아남은 백성들이 다른 고을로 옮겨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배수진을 쳤다. 이로서 단양군은 10년간 면세하여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풍기에서 출생한 금계 황준량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퇴계학파의 맏형이며, 청빈·애민의 목민관이어서, 20여 년의 벼슬살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을 때 염습을 쓸 만한 천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고 전한다.

그는 21세에 생원(生員)이 되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 후 성균박사, 공조좌랑, 호조좌랑, 병조좌랑 등을 거쳐 신령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에 이르렀다.

금계는 가는 곳마다 교육진흥에 특히 힘을 기울였다. 신령현감 때 백학서원, 성주목사 때 공곡서당, 영봉서원을 창건·증축하였고, 단양군수 때는 단양향교를 현재 위치에 옮겨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런 공로로 단양향교에는 그의 선정비가 세워졌고(지금은 수몰이주기념관으로 옮겨짐), 특이하게도 그의 사후 그의 문집[錦溪集]을 단양군이 간행해 주었다.

단양향교 600주년기념비에도 역대군수의 대표자처럼 각자되어 있다. 이렇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도 재임 시 단양군수로서의 끼친 업적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문하이며 자신보다 16세나 아래인 금계가 47세의 아까운 일기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대학자인 퇴계가 그를 기려 직접 제문을 지어 애도했고, 행장을 찬해 그의 생애를 정리했으며, 그가 남긴 글을 손수 교열해 문집으로 엮었을 뿐 아니라 명정(銘旌)에 ‘선생(先生)’이라고 높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500년이나 지난 지금 농민작가 조순호에 의해 역사소설의 주인공으로 다시 환생한 끔찍한 목민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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