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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태(胎)를 묻었다는 전설의 마을 ‘태장1리’우리마을 탐방[159] 순흥면 태장1리(상·중태장)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7.07.25 12:15
  • 호수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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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전경

생명존중의 장태(藏胎)문화를 간직한 태승지
일념통천(一念通天)으로 화합하는 행복마을

순흥면 태장1리 가는 길

봉현면 오현교차로에서 순흥방향으로 3Km쯤 가다보면 ‘태장천교’라는 간판이 보이고, 도로 좌측에 수령 600년의 태장리느티나무가 나타난다. 여기가 태장1리로 가는 입구이다. 이곳은 순흥과 풍기 사이 경계지점이라 하여 ‘지경터’라고도 부른다.

홍교천을 따라 1km쯤 올라가면 태장3리이고 500m가량 더 올라가면 태장1리다. 지난 9일 오후 태장1리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강찬수 이장, 권기웅 노인회장, 최순옥 부녀회장, 정지명 전 이장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태장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마을상징 표석

역사 속 태장마을
순흥은 고구려의 급벌산군(급伐山郡), 신라 경덕왕 때 급산군(급山郡), 고려 때는 흥주(興州)-순정(順政)으로 고쳐 불렀다. 고려말 충렬왕의 태(胎)를 안치하고 흥령현령(興寧縣令)으로 고치고, 충숙왕 때 또 태를 안치하고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됐다.

충목왕 때 또 다시 태를 안치하고 순흥부(順興府)로 승격시켰다. 순흥이 부(府)가 된 것은 임금의 태를 안치한 덕인 듯하다. 조선 태종 13년(1413)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로 고쳤다.

‘태장’이란 지명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849년 안정구가 펴낸 순흥지’에 의해서다.

순흥지에 보면 관아가 있는 현 순흥면 지역을 대평면(大平面)이라 하고, 아신리(衙薪里.읍내1,2리), 태장리(台庄里), 한산리(漢山里.항상골), 묵동(墨洞.거묵골), 사현정, 성하리, 석교, 죽동 등 13개 마을(里)이 있었다.

항상골 전경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태장리는 상대리(上臺里)와 하대리(下臺里)로 분리 개칭되었으며, 한산리는 항상동(項上洞)으로 고쳤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순흥군, 풍기군, 영천군을 영주군으로 통합하고, 대평면의 상대리, 하대리, 항상동, 묵동을 순흥면 태장리로 통합했다. 그 후 일제 중엽태장 1,2,3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황당

고려 삼왕 태실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동국지도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충렬왕(1236-1308)의 태실이 소백산에 있다”고 적혀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렬왕의 태실을 두었기 감무를 두었던 순흥을 흥령현령으로 승격했다”고 적혀 있다.

일제 때 출간한 조선보물조사자료집에 “배점리 구릉정상에 선반돌 여러 개와 삼척 팔각형 뚜껑이 남아있다”고 기록했다.

1999년 조선의 태실을 조사한 이주환(李周煥.민족문화연구원)외 2인은 “충렬왕의 태실은 분명 초암사 근처 또는 석륜암 근처에 있었지만 도굴 등으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고려 27대 충숙왕(忠肅王)/동국지도와 해동지도에 “충숙왕(1294-1339)의 태실이 소백산 경원봉(慶元峰)에 있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충숙왕의 태를 안치하고 현을 주지사로 승격했다”는 기록이 있고, 풍기의 고적에는 “경원봉은 군 북쪽 22리에 있고, 이곳에 충숙왕의 태를 묻었다”라고 했다.

송이정

그러나 지금 경원봉을 아는 사람이 없다. 결국 문헌상으로만 전하는데 윤암봉과 욱금동 사이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29대 충목왕(忠穆王)/동국지도에 “욱금동에 충목왕(1337-1348) 태실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태실 조사단에 의하면 “비로사 보법탑비에 고려 태조가 진공대사를 보기 위해 욱금을 넘나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대웅전 중창 때 나온 상량문에 “비로사가 충목왕태실수호사찰이라는 기록이 발견됐다”고 했다. 이상에서 볼 때 고려 삼왕 태실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굴 등으로 위치 확인이 어려운 현실이다.

태장의 지명유래
장태(藏胎)란, 예전에 왕실에서 아기를 낳았을 때 그 태(胎)를 묻는 것을 일컫는다.

순흥면 태장리는 우리지역 장태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주민들은 “임금의 태를 묻어 ‘태장’이라 부른다”고 말한다.

권기웅(76) 노인회장은 “고려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 세분의 태(胎)를 안치한 곳이라 하여 ‘태장(胎藏)’이라 부른다”면서 “태봉과 태실에 대한 정확한 위치정보는 없고, 구전으로만 전한다”고 했다.

100년 흙벽돌집

그런데 현재 태장리는 아이 밸 태(胎)자에 감출 장(藏)자 태장(胎藏)이 아니고, 별 태(台)자에 엄숙할 장(庄)자 태장(台庄)으로 쓰고 있어 의문이다.

순흥면 지명유래(전화번호부)에 “일제가 태장(胎藏)을 태장(台庄)으로 ‘창지개명’했다”란 유래는 사실무근이다. 왜냐하면, 순흥지에 보면 조선 후기부터 이미 ‘태장(台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태장의 유래가 있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춘호(春湖) 류영경(柳永慶.1550-1608) 선생은 1550년(명종5년) 한양에서 출생하여 풍기 백곡(희여골) 창원황씨가에 장가들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아들 오형제와 가솔을 데리고 처갓집 부근인 순흥 태장(망정골)으로 내려와서 잠시 기거를 하게 된다.

태장1리 사람들

당시 정승을 ‘삼태(三台:영의정,좌의정,우의정)’라 불렀기 유영경의 사연에 유래하여 마을이름이 태장(台庄)이 됐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당초 고려 3왕의 태를 묻어 태장(胎藏)이라 부르다가 ‘영의정을 지낸 류영경 선생이 살던 곳’이라 하여 그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태장(台庄)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 무렵(1700년경) 순흥부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지역 유림에서 동명을 태장리(台庄里)라 칭함에 따라 순흥지에 태장(台庄)으로 기록됐다.

천태승지

태승지(胎勝地)의 마을
마을회관 앞에 태민일념원통천(胎民一念願通天)이란 표석이 있다.

‘무슨 뜻이냐?’고 여쭈니, 정지명 전 이장은 “태장 주민일동이 한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면 그 뜻이 하늘에 닿아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라며 “태장은 장태문화를 바탕으로 마을의 화합을 강조하는 선조님들이 남긴 교훈”이라고 말했다.

태장1리로 오르는 길에는 ‘천태수석(天台水石)’이란 바위글씨와 ‘천태승지(天台勝地)’라고 새긴 표석이 있다. 이 또한 삼태(三台)의 인물이 태어날 명당 터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중태장과 항상동 사이에 서낭당이 있다. 이 당의 내력을 돌에 새긴 정계동(75)씨는 “이 당은 오랜 옛날부터 여신(女神.胎의神)을 모신 당으로 생명존중의 장태문화를 이어온 신령한 곳”이라며 “정월대보름날 국태민안과 주민화합을 기원하고, 삼재팔란(三災八難)을 몰아내고 오복칠상(五福七祥)을 들이기 위한 동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태장 가는길

태장1리 사람들
강찬수(55) 이장은 “태장은 삼태(三台)가 태어날 명당이라 하여 태장(台庄)이라 부르기도 한다”며 “6.25후에서 1960년대까지는 60여호에 500여명이 사는 큰동네였으나 지금은 30여호에 60여명이 산다. 마을에 트랙터가 한대도 없을 정도로 논농사는 줄고 100% 사과농사가 번창했다”고 말했다.

최순옥(57) 부녀회장은 “우리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어머니 품안에 안겨 있는 듯 포근하고 편안하다”며 “최근 귀농이 12가구로 늘어 살기 좋은 마을로 소문났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태어나 군복무 후 객지에서 살다가 5년전 귀촌했다는 강진세(86) 어르신은 “일제 때는 항상골 안쪽에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는데 6.25 전 빨갱이들의 출현으로 소개령이 내려 아래쪽으로 이거해 왔다”고 말했다.

이 마을 우용근(76)씨는 “항상골에 사셨던 정호익(鄭鎬益.초계정씨19세손) 선생은 한성사범 출신으로 1906년 사립소흥학교(현 순흥초) 설립 당시 교감으로 부임하셨으며, 그 후 27년동안 순흥면장을 지내신 신교육구국운동의 선구자이셨다”고 말했다.

덕촌에서 가마타고 항상골로 시집왔다는 심옥분(84) 할머니는 “가마에서 내리니 ‘오두막 마당’이었다”면서 “숟가락도 없이 살았으며 산에서 나는 옥수수, 감자, 조밥이 주식이었고, 보리고개를 넘을 때는 송구밥과 조당수로 연명했다”고 말했다.

마을회관

17살 물야 처녀가 태장으로 시집왔다는 전일순(81) 할머니는 새댁 시절 참 힘들게 살았다고 했다. “고구마 5관(32k)이고 독안터재 넘어 풍기장에 가서 팔면 쌀 1되 사가지고 왔었다”며 “당시는 식구가 안 굶고 사는 게 최대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덕현에서 태장으로 시집왔다는 심연화(68)씨는 “우리마을은 어른을 섬기고 화합·단결하는 행복마을”이라며 “면민체육대회 등 각종 대회에 나가면 태장1리는 항상 1등”이라고 자랑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태장1리 마을사람들>

강찬수 이장
권기웅 노인회장
최순옥 부녀회장
정지면 전 이장
강진세 어르신
심옥분 할머니
전일순 할머니
우용근 씨
정계동 씨
심연화 씨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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