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고려시대 유일의 불화 부석사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의상이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서 수업하고 있을 때 그 이웃 정업사에는 도선율사가 있어 항상 천공(天供)을 받아 제(齋)를 올린다고 했다.

하루는 도선이 의상을 초청했다. 의상이 와서 자리에 앉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하늘로부터 공양이 오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루로 돌아간 후에야 천사가 내려와 “골짜기 가득 신병(神兵)이 가로 막고 있어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도선은 의상에게 신의 호위가 있음을 알고 도(道)가 자기보다 높은 것에 탄복하였다 한다. 도선율사는 의상보다 29년 손위로 알려져 있다.

의상대사 존영을 모시는 부석사 조사당에는 벽면 빼곡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름 하여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이다.

원위치의 순서대로 ①보살상(菩薩像-불명미상), ②다문천왕상(多聞天王像), ③광목천왕상(廣目天王像), ④증장천왕상(增長天王像), ⑤지국천왕상(持國天王像), ⑥보살상(菩薩像-불명미상) 순이다.

양쪽의 불명미상의 불화는 불교의 호법신인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석과 범천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나, 지국·증장·광목·다문으로 구성된 사천왕은 갑옷과 투구를 걸친 무인형으로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무장상이다. 이 6폭의 수호신이 이른바 의상의 호위병이 아닌가 한다.

조사당벽화는 고려시대의 불화로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 면 길이 약 205cm, 너비 약 75cm로 된 각 6폭으로 화면 손상이 심한 편이며, 1910년대 일제가 벽체를 떼어낸 것을 무량수전 동쪽 벽에 기대어 보관하다가 안양루 아래 보장각을 거쳐 지금은 유리 상자에 넣은 상태로 유물전시관에 보관중이다.

원래 이 그림은 조사당 입구에 배치되어 석굴암과 비슷한 구도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불상 대신 부석사 창건주이자 화엄종의 조사(祖師)인 의상조사를 호위하는 신병들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의상조사가 부처님과 거의 동격으로 존숭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화엄종의 수사찰(首寺刹)인 부석사에서 본법당(本法堂)보다 더 높은 곳에 조사당을 짓고 의상대사 존영을 봉안했으며, 벽면 가득 신장상을 그려 호위하도록 한 것은 신라 화엄종의 초대 조사에 대한 존숭의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사당의 위치와 함께 화엄종에서는 초대 조사를 부처님보다 오히려 더 받들어 모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시사를 내포하는 중요한 회화 자료인 셈이다.

조사당벽화는 또한 현존하는 고려시대 유일한 불교벽화라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의 회화(繪畵)는 보존된 유적이 매우 희귀해서 그 양상을 정확히 판단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부석사조사당벽화는 이 건물 안쪽 벽면에 그려졌던 건축당시의 작품으로서 추정되고 있다.

조사당을 중수할 당시 발견한 묵서명문(墨書銘文)이 건물 연대를 서기 1377년으로 밝혔으므로 벽화의 제작연대도 같은 시기로 볼 수 있다.

현재 국내의 고려시대의 벽화로는 남·북한을 통 털어 부석사조사당벽화가 유일하다. 예산수덕사대웅전에 벽화가 있었으나 일제와 6.25를 거치는 동안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북한 지역에 2~3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건 고분 속의 벽화여서 건물벽화와는 확연히 다르며 확인 역시 쉽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그런 점에서 부석사조사당벽화는 벽의 누수로 오염된 부분이 있고, 또한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금이 가고 채색이 많이 퇴색되기는 했어도, 당시 불화의 성격을 짐작하는 유일한 벽화이기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소중히 다루어야 할 값진 국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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