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시인·문학박사)

심산 김창숙은 성주에서 의성김씨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 불리는 면우 곽종석 선생께 배웠다. 26살 때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경복궁 앞에 나아가 을사5적의 목을 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향에 돌아와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설립하고 성명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송병준 등의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하자 역적을 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8개월간 수감된다.

그의 그칠 줄 모르는 독립투쟁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시대를 구하려는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선비다”라는 그의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심산을 모르고 선비정신을 말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19년 3.1혁명이 실패하자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이른바 파라장서를 준비한다. 선비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심산은 전국의 유림을 찾는다. 같은 의성김씨 순흥의 부호 김교림을 만나고 그의 주선으로 봉화 바래미 남호 김뢰진 가에 머문다.

유림 137명의 서명자 가운데 닭실 권씨 6명과 바래미 김씨 3명이 이름을 올린 것은 그러한 연유이다. 파리장서는 김규식을 통해 해외에 전파되었다. 이를 1차 유림단 사건이라 한다.

2차 유림단 사건은 1925년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에 추대되어 몽골에 군사기지를 세우기 위해 국내로 잠입해 군자금을 모은 사건과 이듬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의사를 지원한 사건이다.

이때 다시 바래미에 머물며 모금을 했다. 김뢰진은 전 재산을 저당 잡히고 거금 2000원을 냈다. 심산은 이 일로 1927년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모진 고문을 받고 14년 형을 받게 된다. 이때 무릎을 짓이기는 고문을 당하여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로 인해 심산은 스스로 아호를 벽옹(벽翁)이라 했다. 앉은뱅이 늙은이란 뜻이다.

심산은 어떤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일본경찰이 고문으로 얻은 것은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지 십년, 내 평생이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야단스레 고문은 해서 무엇 하는가’라는 뜻의 시 한 편뿐이었다.

1934년 보석으로 풀려나서 요양할 때 일경은 창씨개명 할 것을 강요했다. 일경이 그에게 들은 대답은 “병들어 죽을 날도 머지않았으니 감옥에 넣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였다.

상해 임시정부시절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다. 심산은 이승만에 대해 탄핵을 제기해서 관철시켰다.

“이번에는 조선을 미국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인가”라는 심신의 일갈이 임정요인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건이었다. 이승만과 심산의 악연의 시작이었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