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58] 부석면 소천5리 ‘사그레이’

사그레이 전경

‘사문(沙文)’이란 ‘모래에 쓴 글’에서 유래
오지마을 달터·폭포와 영모대 등 전설 많아

부석면 사그레이 가는 길
‘사그레이’는 백두대간 고치령과 마구령 사이에 있는 미냇재(美乃峙)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부석면소재지 초입 119지역대 앞에서 사문로를 따라 부석저수지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부석중학교가 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면 좌우가 모두 과수원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과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마을이 보인다. 여기가 사과로 유명한 사그레이 마을이다.

지난 2일 사그레이에 갔다. 마을 가운데 있는 노인정에서 김종호 이장, 이정군 노인회장, 배순덕 할머니, 김옥중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사그레이 마을회관

역사 속의 사그레이(沙文)
삼국사기에 보면 부석면 지역은 「고구려의 이벌지현(伊伐支縣)이었으나 신라 경덕왕(재위:742-765) 때 인풍현(인豊縣)으로 고치고, 급산군(급山郡.옛순흥)에 예속 시켰다」라고 기록했다. 고려 때는 흥주, 순정, 순흥부에 속한 현(縣)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부가 도호부로 승격하면서 순흥도호부에 예속됐다.

조선 중기 무렵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옛 인풍현에 속해있던 단산지역은 일부석면, 용암·감곡지역은 이부석면, 소천·북지·노곡 지역은 삼부석면이라 칭했다.

이 때 사그레이는 삼부석면(三浮石面) 사문단리(沙文丹里)가 됐다. 그 후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일부석면이 단산면으로, 이부석면이 용암면으로, 삼부석면이 봉양면(鳳陽面)으로 개편됐다.

이 때 사문단리가 상사문(上沙文)과 하사문(下沙文)으로 분리되면서 사그레이는 상사문리가 됐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순흥군, 풍기군, 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고, 봉양면, 용암면, 도강면이 부석면으로 통합되면서 사그레이는 영주군 부석면 소천리에 속했다가 해방 후 소천5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달터 옛집

 사그레이(沙文)의 유래
사문(사그레이)이라는 지명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849년 순흥인 안정구(安廷球)가 편찬한 순흥지(順興誌) 방곡(坊曲)편에 ‘삼부석면 사문단리(沙文丹里)’라는 기록이다. 그럼 ‘사문단’이란 어디에서 유래됐는지? 궁금하다.

영주시사(2010발행) 지명유래편에 보면 「옛날 학문 높은 김희소(金熙昭)라는 선비가 경치 좋은 산천을 찾아다니며 글 읽기를 즐기던 바 이 마을에 있는 폭포에서 글을 읽고, 폭포로 이루어진 ‘모래밭에 글을 썼다’고 하여 모래 사(沙)자에 글월 문(文)자를 써 ‘사문(沙文)’이라 했다」고 적었다.

그럼 ‘사문단(沙文丹)의 단(丹)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의 지명유래’란 책에 보면 「예로부터 단(丹)자가 들어간 지명은 ‘산수가 아름답고 물맛이 좋은 곳」이라고 했다. 딱 맞는 말이다. 사문은 산수 수려하고 물맛 좋기로 양백지간 으뜸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사그레이’라고 부른다.

사그레이는 사문에서 유래됐다. ‘沙文’은 모래 사(沙) 자의 ‘사’라는 음(音)과 글월 문(文) 자의 ‘글’이라는 훈(訓)이 결합하여 ‘사글’이 됐고, ‘사글’이 ‘사글쟁이’ 또는 ‘사그레이’ ‘사그랭이’로 변해 굳어졌다.

또 사기를 굽는 가마가 있어 ‘사기쟁이’가 ‘사그랭이’로 됐다는 설도 있다.

사과의 바다

김희소(金熙昭)는 누구인가?
모래밭에 글을 썼다는 ‘김희소(金熙紹.1758-1837)란 선비가 누구인지?’ 궁금하여 수소문해 봤다. 김희소는 봉화 바래미(海底) 출신으로 의성김씨 해저문중 개암공(開巖公.1524-1590)의 8대손이다.

1803년(순조3)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소수서원의 동주(洞主.서원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는 ‘대학(大學), 중용(中庸), 맹자(孟子) 등을 강의했다. 그는 주자와 퇴계집을 탐독하고, 사서오경 등을 읽다가 의문점을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여 거가차록(居家箚錄)을 집필할 정도로 학문의 척도가 높았다고 한다.

벼슬에 뜻이 없었던 김희소는 자개봉(紫盖峯) 아래(沙文) 초옥을 짓고 문천거사(文泉居士)라 호하며, 교천서숙(交川書塾.큰서당)에 첨학소(瞻學所)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는 산림에 숨어 궁곤하게 지내면서도 정력을 쏟아 학문에 힘써 향리의 모범이 되어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됐다. 개암공 후손 김두기(78.봉화 바래미) 씨는 “저희 문중에서는 문천할배로 통했다”며 “오직 학문에만 힘써 당시 지역 유림을 대표하는 명망 높은 선비였다”고 말했다.

미냇재 가는 길

미냇재와 달터
지난해 이 마을 남수길(52)씨가 쓴 ‘미냇재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서 달터에 먼저 가봤다. 저수지에서 2km 쯤 갔을까. 사방이 산이고 하늘만 빤하다.

‘여기가 옛 마을 같은데?’ 망설이고 있을 때 트럭 한 대가 내려왔다. 이 마을 송명화 씨다. “여기가 ‘달터’ 맞다”고 했다. 조금 더 올라가니 2010년까지 사람이 살았다는 집이 2채 있다.

평양근처에 살다가 2살 때 부모님을 따라 여기에 와서 1974년까지 달터에 살았다는 손복순(78)씨는 “당시 달터에는 40여 가구가 살았고, 달터와 미냇재 사이에도 수십 가구가 살았다”면서 “감자, 옥수수, 서숙으로 연명하며 원시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노곡에서 달터로 시집왔다는 강춘금(82) 할머니는 “1970년대 후반까지 의풍, 마락 사람들이 부석장을 보기위해 미냇재를 넘나들었다”며 “나무, 숯, 잡곡, 산나물 등을 팔고 석유, 성냥, 고무신 등을 사가지고 갔다”고 말했다.

김종호(65) 이장은 “일제 때 모든 것을 착취당하고 화전이라도 일구어 먹고 살려고 산속으로 숨어든 사람들이 화전민”이라며 “달터, 도화동, 마락 등지에 수백가구가 살았다”고 말했다.

사문폭포

완폭대와 영모대
김종호 이장 안내로 사문단의 비경 폭포를 찾아갔다. 기암괴석 사이를 흐르는 폭포를 예전에는 완폭대(玩瀑臺)라 불렀다. 예전에 이곳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순흥지에 보면 “깎아지는 절벽과 넝쿨이 울창하여 절경이다”라고 했다. 폭포 안쪽에 영모대(永慕臺)가 있다기에 김 이장과 찾아봤지만 안 보인다. 아마도 댐공사로 사라진듯하여 아쉬움이 크다.

이정군(75) 노인회장은 “댐이 생기기 전에는 수로 건너편에 ‘영모대’라고 새긴 바위글씨가 있고, 그 아래쪽에 있는 기암과 폭포는 절경이었다”며 “영모(永慕)란, 맹자가 말하기를 ‘몸을 마칠 때까지 어버이를 사모(思慕)한다’는 말에서 취한 것으로, 선대 선비들이 남긴 교훈”이라고 말했다.

영모대는 찾지 못했지만 「노양수석(魯陽水石)」 「우계이씨묘위동(羽溪李氏墓位洞)」 등 바위글씨를 관찰했다. 폭포 주변을 둘러본 후 김 이장은 “폭포를 중심으로 기암괴석과 계곡 그리고 느티나무 숲이 마을의 보물”이라며 “숲 주변을 정비하여 공원화하고, 폭포 위로 출렁다리를 하나 놓으면 사과마을 체험과 함께 영주의 또 하나의 명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석지

사그레이 사람들
마을 초입에 숲과 정자가 있고, 신축 건물 앞에는 오토캠핑장 정비 사업이 한창이다. 김종호 이장은 “우리마을은 논은 한 뼘도 없고 모두 사과뿐”이라며 “1980년 이후 사과가 부(富)를 안겨주었다. 현재 34가구에 60여명이 사는 사과마을”이라고 말했다.

배순덕(88)·김옥중(87) 할머니는 70년 전 같은 해 물야에서 사그레이로 시집왔다고 한다. 김옥중 할머니는 “새댁시절 6.25전 어느 날 밤. 제사 준비를 하던 중 빨갱이들이 들이닥쳐 제사 음식을 모두 빼앗아 가는 바람에 메만 한 그릇 떠 놓고 제사를 지낸 적이 있다”고 하면서 웃었다.

사그레이 사람들

배순덕 할머니는 “보리고개를 넘으며 어렵고 힘들게 살아 온 세월이 꿈만 같다”며 “사과농사를 시작한 후 살림이 넉넉해 진 편이다.

또 김종호 이장님이 회관도 새로 짓고, 목욕탕도 마련한다고 하니 정말 좋다”고 하면서 환한 표정을 짓는다.

경주에 살다가 이곳으로 왔다는 이금순(84) 할머니는 “우리 이장님은 집집마다 애로사항을 다 해결해 줘서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며 “전기, 보이라, 수도 등 고장 나면 즉시 해결해준다”며 고마워했다.

사그레이 골목길

성남에 살다가 산좋고 물좋고 공기좋은 곳을 찾아왔다는 심경녀(80) 할머니는 “20년전 이곳에 왔으니 이제 사그레이 사람 다 됐다”며 “우리 마을은 축산 같은 오염원이 하나도 없어 자연그대로 청정마을”이라고 말했다.

“마을의 자랑이 뭐냐?”고 여쭈었더니 배채선(77) 씨는 “우리마을의 자랑 첫째는 물이 좋은 거”라면서 “수원지가 달터 위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나오는 물을 끌어 오고 있어 진짜 천연수(天然水)”라고 말했다.

“사그레이 사과의 특징이 뭐냐?”는 질문에 김옥선(75)씨는 “맛좋고 빛깔 좋은 사과가 그냥 만들어 지는 게 아니라 적과, 봉지씌우기, 잎따기, 약치기 등 수많은 손길과 정성이 들어가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배순덕·김옥중 어르신도 일년에 사과봉지 2천 500장이나 씌울 정도로 일을 많이 하신다”고 했다.

달터 풍광

<부석면 소천5리 사그레이 사람들>

김종호 이장
이정군 노인회장
배순덕 할머니
김옥중 할머니
이금순 할머니
강춘금 할머니
심경녀 할머니
손복순 씨
배채선 씨
김옥선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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