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57] 하망동 '원댕이'마을

원당 마을 전경

소고 선생이 유유자적하며 도(道)를 즐기던 곳
팔형제 모두 과거급제한 명가, 유연당(悠然堂)

하망동 원당마을의 입지
원당(唐塘)을 ‘원댕이’라고도 부른다. 원당마을은 원당오일장 중심에서 철도건널목 건너 원당고개 주변 동네와 영동선 기차길옆으로 기다랗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원당에는 새지골, 삼밭골, 버럭고개와 같은 옛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고, 지금은 코롱아파트, 하망동사무소, 성남교회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달 25일 원당마을에 갔다. 이날 원당경로당에서 김세현 노인회장, 김계락 어르신, 박필녀 할머니, 오원희 씨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원당마을의 유래과 전설을 듣고 왔다.

마을의 상징

역사 속의 원당마을
영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기군(奈己郡), 신라의 내령군(奈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로 불렀고,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영주의 옛이름)이 됐다.

원당 지역은 조선 중기 무렵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봉향리(奉香里) 원당방(元塘坊)이라 부르다가 영조 무렵(177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하면서 봉향면 원당리(元塘里)가 됐다. 그 후 조선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봉향면 하망리(下望里)에 편입됐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하망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세현 노인회장은 “원당마을은 오랜 역사와 문화가 남아있고, 선비정신을 계승해 온 마을”이라며 “마을의 자랑인 유연당(김대현의 호 겸 당호) 김대현 선생은 임진왜란 때 난민을 구하고, 전 재산을 털어 어려운 이웃을 보살핀 훌륭한 목민관이요 참다운 선비였다”고 말했다.

원당마을 사람들

망동과 원당의 유래
조선 때 배치암(裵癡巖.1581-미상)이란 선비가 (보름골) 치바위 밑에 살았는데 이곳에서 보면 마을이 넘어다 보인다 하여 ‘망동(望洞)’이라 불렀다. 조선말(1896) 인구가 늘어 망동이 상망과 하망으로 분리됐다. 그럼 ‘원당이란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됐을까?’ 궁금하다.

영주시사에 보면 「고려 때 마을 뒤 큰 절 옆에 원당(元塘)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조선 때 퇴계의 문인인 고령인 박대령(朴大齡.1515-미상)이란 선비가 마을 이름을 지을 때 원당지(元塘池)에서 유래하여 ‘원당’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해 ‘원댕이’가 됐다」고 적었다.

이 마을 정종식(73)씨는 “제 어릴 적 원당고개로 넘어가는 길은 오솔길뿐이었다. 고갯마루에 버럭바위가 있어 ‘버럭고개’라고 불렀다”면서 “버럭바위 틈에 돌을 던져 넣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다”고 말했다.

1970년대 원당건널목

소고선생이 살던 마을 ‘원당’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 선생은 두서(현 영광중 서편)에서 태어나 20세 무렵 예천권씨에 장가들어 원당에 살림집을 차렸다. 당시 원당에 터전을 마련한 것은 영천군수(1511-1516)를 지낸 장인 권오기(權五紀.예천인)의 집이 원당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지역 유명 인사들의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소고의 장인은 졸재 권오기(1463-미상.문과급제.左通禮역임)이고, 권오기의 장인은 야성송씨 영주 입향조 눌재 송석충(1454~1524)이고, 눌재의 장인은 문종 때 상장군을 지낸 휴계 전희철(1425-1527)이고, 휴계의 장인은 감천문씨로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을 지낸 문손관(文孫貫.문경동의 조부)이다.

이들 모두 당대 뛰어난 유학자요 재력가요 문벌귀족들이다. 또 이들 모두 처가 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봐서 당시에는 처가 곳 또는 처갓집에 새살림을 차리는 것이 당연한 풍속이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소고 선생은 1540년 문과에 급제한 후 풍기군수(1558-1563) 임기를 마치고 고향(원당)에 돌아와 취향정, 동리서재, 소고대를 짓고 은자(隱者)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다. 그 후 황해도사, 경주부윤 등 임기를 마친 후에도 고향에 돌아와 유유자적(悠悠自適) 도(道)를 즐기던 곳이 ‘원당’이었다. 노년에 하한정으로 가기 전까지 ‘원당’에서 후진 양성을 위한 강학을 이어갔다.

제자 임흘(任屹)이 쓴 행장(行狀)에 보면 “벼슬생활 40년동안 시골집은 허름한 집에 척박한 땅이었고, 한양생활은 셋집을 얻어 가난한 살림을 꾸려갔다. 그의 허름한 초가집 벽은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고개 숙여 글을 읽고 머리 들어 생각하면서 언제나 정중하고 누구에게나 공손했다. 마을에 집이 있었지만 재상댁(宰相宅)인줄 아무도 모를 정도로 문 앞이 조용했다”고 썼다. 반남박씨종회 박춘서 도유사는 “선생께서는 도승지, 대사간 등 중앙요직과 황해도 관찰사, 경주부윤 등 목민관을 역임하셨지만 고향에는 번듯한 기와집 한 채 없는 청빈한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

유연당

‘팔련오계’를 배출한 유연당
하망동사무소 뒤편에 유연당(悠然堂)이란 고택이 있다. 유연당은 산음현감, 이산서원장을 지낸 김대현(金大賢)의 호이면서 당호다.

이 건물은 김대현(1553-1602)이 1589년 그의 외가(안동권씨)가 있던 영천 봉향리(奉香里) 휴천방(현 휴천동삼각지부근)에 건립하였으나 잦은 수해로 후손들이 사례(沙禮.현 시의회옆 요선재뒤)로 옮겼다가 1926년 일제 때 현재 자리로 옮겼다.

유연당은 삼판서고택, 백암고택과 함께 영주의 3대 고택 중 하나로 김대현이 거주하면서 임진왜란 극복에 기여함과 동시에 팔련오계(八蓮五桂)를 배출한 지역 역사문화의 상징적 의미가 큰 건물이다. 우리 역사상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경우는 고려조 2가문, 조선조 5가문으로 영남에서는 김대현의 아들 5형제가 유일하다.

유연당의 장남 김봉조는 사헌부 지평, 2남 김영조는 이조참판, 5남 김연조는 예문관 한림, 6남 김응조는 한성부우윤·1650년경 영주지(학사본) 편찬, 9남 김숭조는 승정원 주서에 올랐다. 당시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仁祖) 임금께서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며 칭송했다.

유연당의 11대손 김계락(89) 어르신은 “팔련오계란, 진사·생원시는 연꽃(蓮榜)에, 문과는 계수나무(桂榜)에 비유하여 8형제 중 8명이 소과에 급제하고, 그 중 5명이 대과(문과)에 급제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유연당 상량문을 번역한 후손 김정현(64.한학자)씨는 “유연당 선조님은 임진왜란 때 영주에서 수많은 난민을 구제하셨고, 그 후손들 또한 해방 후 무렵부터 6.25 이후까지 어려운 사람들에게 판잣집이라도 지어서 살 수 있도록 집터를 배려해 주었다”고 말했다.

원당공원

원당천과 원당로
지금 원당로 주변에는 원당식당, 원당건널목, 원당경로당, 원당공원 등 ‘원당’이란 옛 지명이 많이 쓰이고 있다. 이 원당로는 예전에 원당천이 흘렀다.

철탄산 동쪽 물과 봉화방향 삽재 물이 화천(禾川.현 상망교차로)에서 합류하여 원당 앞을 지나 광승으로 흘러 구천(현 서천)에 흡수됐다. 40년전 원당천은 지금 원당로를 따라 아모르예식장-삼각지 앞을 지나 가흥동 벚꽃길에서 서천에 합류됐다. 1982년 원당천 수로변경(술바우방향)으로 원당천이 원당로가 됐다.

원당 5일장

원당마을 사람들
기자가 원당경로당에 도착하니 평은댁이 가지고 온 미수가루를 먹으면서 화투놀이도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창길(78) 노인회 총무는 “본래 마을이름은 원당인데 사람들은 ‘원댕이’라고 부른다”면서 “김세현 노인회장님이 경로당을 잘 이끌어 주셔서 늘 시끌시끌한 경로당”이라고 했다. 40년전 원당에 왔다는 오원희(73)씨는 “당시 코롱아파트 자리에 초가집이 몇 채 있었는데 월세 2천원에 살면서 시장에 나가 장사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39년 전 강원 정선에서 영주로 이사 왔었다는 장순남(81) 할머니는 “예전에 원당천에는 빨래 삶아주고 염색해 주는 장사가 유행했다”며 “그 때 원댕이는 다닥다각 판자집이 많은 마을이었다”고 말했다.

원당에서 40년 살았다는 권종연(83) 할머니는 “원당은 도심 주변이지만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달마을”이라며 “골목길도 리어카가 겨우 다니는 달동네지만 이웃끼리 서로돕고 정나누기를 하면서 사는 인심좋은 마을”이라고 말했다.

‘노가다 40년 했다’는 박승연(83) 할머니는 “보릿고개 세대들은 모두 어렵고 힘들게 살았다”면서 “그 때는 영주가 교통 중심지여서 장사가 잘 됐다. 지금은 나라의 도움으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연세가 제일 높으신 박필녀(86) 할머니는 “지금 나라가 어렵다”면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을 잘 돌봐주는 나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말했다. 경로당에서 나와 원당공원에서 6.25 참전용사 정종화(90)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은 “원당마을은 옛날 인심 그대로 화목한 마을”이라며 “김세현 노인회장님이 덕이 많아 회관이 늘 북적인다”고 말했다. 이날 원당 건널목 주변에서는 성남교회(목사 권성흠) 성도들이 차(미수가루) 나눔 봉사를 하고 있었다. 김 노인회장은 “성남교회는 오일장날마다 차(茶) 봉사를 한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하망동 원댕이마을 사람들>

김세현 노인회장
김계락 유연당 후손
정종화 참전용사
박필녀 할머니
권종연 할머니
박승연 할머니
장순남 할머니
고창길 노인회 총무
오원희 씨
정종식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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