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흥1동 쥬벤시아 씨

한국에서, 영주에서 살기를 선택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 결혼 전과 후, 최소 두 국가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 피부로 느낀 영주는 어떠한 곳일까. 정착단계부터 영주의 변화를 바라봐 온 그들에게 물었다. [편집자주]

▲쥬벤시아 씨

어릴적 바람인 교사의  꿈 이뤄
다문화 가족의 화해와 소통 역할도

필리핀 세부 칼칼 시티에서 온 쥬벤시아(49) 씨는 1997년 영주로 왔다. 낭랑한 말씨에 애교 많고 활달한 그녀는 지난 23일 만남에서 자신의 성장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형제자매가 많고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형편이었지만 다른 누구보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강했던 그녀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 대장이었단다. 항상 “왜?”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던 그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친척집에서 낮에는 일을 돕고 오후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했다.

더 나은 생활을 기대하며 혼자 힘으로 대학을 나온 그녀는 교사시험을 보고 발표를 기다리며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남편을 소개받았다. 

▲애틋하게 그리워하다
그녀는 남편과의 연애스토리가 시작되자 환한 미소를 짓는다.

1995년, 한국남자는 가정적이라는 말을 듣고 남편을 소개받았다. 처음 사진으로 만난 그는 키도 크고 잘 생겨서 그녀의 마음에 쏙 들어단다.

1996년 필리핀으로 찾아온 남편과 5일 간의 연애가 시작됐다. 서로가 마음에 들었던 그들은 짧은 만남이 장거리 연애로 이어져 전화와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당시 남편은 월급의 반이 전화요금으로 날아갔다고 했어요. 매주 토요일 밤이 되면 남편에게 전화가 와서 잠을 설쳤어요. 남편은 나하고 통화를 해야 잠이 온다고 했어요”
1시간30분에서 2시간여를 통화했단다. 한국말도 한 단어씩 배웠다.
노래해 달라고 하면 한국말로 “사랑해 당신을~”하고 불러줬다며 웃어보였다.

▲영주에서 옹기종기
한국에 오기 전 책으로 한국을 알아갔다. 막상 한국에 오자 책과는 달랐다. 밥 먹을 때 나이 많은 시어머니는 일하는데 남자들은 가만히 있어 이상했단다. 물이 옆에 있는데도 물을 가져오라고 시키는 것도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남편이 어머니가 살아온 시대의 풍습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문화가 달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남편은 큰 힘이 됐지요. 내편이 생긴 것 같았어요” 그녀가 한국에 온 그 해는 IMF때였다. 신랑이 다니던 회사도 없어지고 사업을 하던 아주버님이 힘들어져 조카를 맡아 키우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와 시어머니는 인삼공장에서 인삼을 깎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단다.

시어머니는 그녀가 일하는 것을 말렸지만 같은 여자인데 할 수 있다며 힘을 보탰다.
첫 월급이 나오던 날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직접 받아보라고 했단다.
가을만 하는 단기일이고 적은 월급이지만 생활비에 보태고 조카에게 용돈도 줬다. 이후 풍기 대성직물에 지인의 소개로 들어가 직원으로 일하게 됐다. 싹싹하고 인사성 바른 그녀가 예뻤던 시어머니는 풍기장날이면 며느리 손을 잡고 가서 자랑을 하고 과일이며 맛난 음식을 사줬다고 자랑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웃으며 인사하고 사람들과 어울려가야 적응도 빨리하고 도움도 받을 수 있어요. 모른다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관심 갖고 다가서면 가족관계도 좋아지는 것 같아요”

▲이제는 부부해결사로 
풍기에서 살 때는 가장 오래 살아온 이들 부부가 모임을 만들어 후배 다문화가족들과 함께 어울리는 시간을 만들었다. 한 달에 한번 정기적인 모임도 하고 크리스마스와 같은 연말행사 때는 더 풍성한 자리를 가졌다.

다른 부부들이 시어머니와의 갈등이나 부부싸움이 생기면 남편은 후배남편에게 그녀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에게 원하는 것을 물어 서로가 이해할 수 있도록 화해시켰단다.

“지금도 좋지만 옛날에 참 재밌었어요. 우리 부부가 먼저 영주에 정착해 살다보니 후배들을 위해 새벽 1시에도 전화를 받고 찾아가 상담해주기도 했어요. 다문화가족이 드물다 보니 그때는 영주는 물론이고 예천, 상주, 공주까지 가기도 했지요”

▲교사의 꿈 영주에서
선생님의 꿈을 그녀는 영주에서 이뤘다. 풍기와 영주에서 어린이집과 학원 등에서 영어를 가르쳐오다 소개를 통해 중앙초등학교로 옮겼다. 그렇게 교사 경력이 쌓여 영주영어체험센터가 들어서면서 안정적이고 원하던 학교교사의 꿈을 이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센터에서 일하던 중 영일초에 가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영어교육을 하게 됐어요. 아이들이 아닌 교사들이란 말에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했죠. 그랬더니 주변에서 능력을 보여주라고 했어요. 그래서 힘을 냈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긴장했던 때가 떠오른단다. 호기심이 많았고 도전정신이 강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아이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교육하고 있다는 그녀.
자신처럼 가정형편 때문에 배움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도움의 손길을 전해왔다.

“옛날에는 다문화아이들을 집에 초대해 영어를 가르쳤어요. 돈이 없어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울까봐 마음이 쓰였거든요. 혼자 사는 할머니, 혼자 살며 몸이 불편한 장애인, 가족처럼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녀는 죽기 전에 힘들게 얻은 자신의 능력을 베풀고 싶은 것이 꿈이란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우선이 되는 남편이 항상 건강한 것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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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자 과장

[미니인터뷰] 영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황미자 과장

지속적인 교육이 안정적인 정착으로

“현재 영주에는 다문화가족이 473세대 정도에요. 베트남이 258세대로 가장 많고 중국이 115, 필리핀이 49, 태국, 일본, 몽골, 캄포디아 등 다양한 나라의 여성들이 영주에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만난 영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황미자 과장은 2008년 센터가 문을 열기 전후 영주의 다문화가족의 정착에 대해 설명하면서 의사소통과 정착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초창기 종교적인 정착이 많았다는 그녀는 국가정책으로 결혼중개업이 생겨나면서 부터 다문화가족에 대한 전문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했다. 취업의 욕구가 강한 이들의 경우는 3개월여의 짧은 한국어 교육을 받고 적은 임금의 단순노무직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한다면 최소 2년 이상 한국어를 배우고 안정적인 정착을 이뤄야 한다고 설명했다.

황 과장은 “자기 주도적으로 배우고자하는 열정, 가족의 관심과 배려가 빠른 언어습득과 정착에 많은 도움이 된다”며 “2년을 배운 사람이 오히려 10년 된 사람에게 통역을 해주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스마트 폰이 있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는 있어도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다양한 전문교육과 육아, 생활정보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은 사회구성원으로써 통합적인 교육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부모역할과 양육, 취업, 지역민과 어울려 살아가기, 사회봉사활동 등이 다양화되면서 센터의 역할도 그만큼 많아졌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적 한계로 가정불화가 생겨날 경우 전문통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황 과장은 긴급, 위기, 법률정보 이외 다양한 정보를 알리고 통역이 가능한 다누리콜센터(1577-1366)를 활용하길 권장했다. 24시간 운영하면서 전문성을 가진 다문화통역사가 동시통역으로 상담하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윤애옥 /김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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