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해로 한 윤정대, 이필순 부부

▲윤정대할아버지, 이필순할머니

남편 큰 꿈 이루게 한 아내의 내조이야기
풍기인견 공장 설립...인견 발전 한몫

70대 할아버지께 귀여운 손자가 “돈” 하면서 손을 내민다. 돈을 줄 때마다 “우리 자랄 때는 보리 고개 넘기기가 그렇게 힘들었다”고 했다. 돈을 받아든 손자는 친구를 만나 “야! 인터넷에 보리 고개 한번 찾아 봐.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고개인지 등산 한번 가 보자”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오늘의 이 풍요가 누구의 피땀 흘린 결과인지를 모르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 해방과 6.25정변, 산업사회 격동기를 인내와 의지로 살아오면서 풍기대광직물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한 윤정대(94), 이필순(90)부부를 만났다.

# 어떻게 풍기에서?

= 윤 회장은 “황해도 장연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 덕에 학교와 한문교육을 병행하였지요. 해방이 되면서 국내외 정세가 매우 불안했습니다. 난을 피하기 위해 십승지지 중 첫 번째로 꼽힌 풍기 금계동으로 1946년 23세 때 단신으로 오게 되었지요. 
떠나오던 날 아버님이 주신 편지(건강, 인내, 열정) 한 장을 받아 들고 선친의 친구 분이 계시는 이곳까지 와서 많은 도움을 받고 살게 되었습니다”

# 당시 하신 일은?

= “어려움의 연속이었지요. 자랄 때 그렇게 힘든 일을 해보지 않았으나 막상 먹고 살기위해 닥치는 대로 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영암선(영주-철암) 철도공사가 한창이었을 때 봉화 소천면 임기에서 청년시절 힘은 있을 때였으니 막노동 난공사 일을 열심히 하였더니 기술 감독 눈에 띄어 3년 만에 난공사기술 자격증을 따게 되었고 보수도 좋았지요.

그 일도 오래가지 못하고 6.25동란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때 피난을 경남 밀양까지 가서 80여일만에 9.18수복 때 다시 풍기로 올 수 있었습니다”

# 결혼 이야기와 신혼초 삶은?

= “부끄럽습니다마는 나의 행실이 그렇게 남의 눈 밖에는 나지는 않았는지 처녀의 고모가 이웃에 살았는데 경기도 수원에 사는 친정 질녀 이필순(당시 22세)씨에게 중매를 하여 1951년도 28세 때 부모님도 안 계시는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기쁨보다는 비애의 눈물까지 흘렸으나 셋방의 안식처이지만 가족인 아내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을 알게 되었지요”

# 그 후에 생활은?

= “군 복무를 해야 할 시절이었는데 마침 철도공사 때 따 놓은 기술자격증으로 미 공병대 군무관으로 들어가 제천, 영월지구 도로, 교량공사 현장책임자로 일하면서 보수가 괜찮아 가족들이 함께 자가숙식이 가능하였습니다. 복무기간을 마치고 다시 풍기로 돌아와 아는 게 인견뿐이니 직조기 2대를 차렸습니다마는 그리 재미를 못 받습니다.

그래서 이를 정리하고 우리내외 아이 셋 데리고 보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산전 3천 평 구입하고 개간 2천여 평, 약 5천 여 평에 감자, 옥수수 등 대농사를 5년간이나 지었습니다.

농사란 사력을 다해 지어도 소득이 적어 가족들도 고생해야 했지요. 후회가 늦기 전에 정리하고 다시 네 번째로 풍기로 돌아 올 때 그 허탈감과 가장(家長)의 책임감을 통감했습니다”

# 남편과 자녀들에 대해?

= 부인 이필순 여사는 “저는 너무 가난했던 일제 때 부모님이 중국 가서 낳아 준 딸입니다. 
귀국하여 혼기가 찼을 때 고모님의 주선으로 만나 보게 되었지요. 보는 대로 육척장신의 키에 건장한 분이었지요. 살아 보니 배포 큰 남편은 아내 고생바가지를 머리에 씌우는 격이었습니다”하면서 고개를 설렌다.

“자녀들은 한창 어려울 때 4남 1녀를 놓게 되고 시친(媤親)부모가 멀리 있으니 산전 산후때 마다 고생이 많았지요. 아이들은 그냥 큽니까? 중등학교 이상은 다 서울에서 시켜야한다 하니 어미가 아니라 뒷바라지 꾼이었지요. 그래도 이제 모두 제 몫 하니 큰 다행입니다. 
돌아보면 그 때 30여 년 어려움은 나에게만 쏟아지는 소낙비 같았지요. 
그래도 고진감래를 기대하고 참고 살았더니 지금의 세월이 온 것 같습니다”

# 다시 시작한 인견 사업에 대해?

= 유 회장은 “그래도 조금 자신 있는 일은 인견뿐이니 또 시작했습니다.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든다고 하기에 몇 대로 하던 것을 정부지원금을 받아 20여대를 설치했더니 수요가 많아져 재미가 있었지요. 그 당시 제품이 27, 36인치였는데 좋은 품질로 바꾸려고 공장도 넓히고(800여 평) 70년대 최초로 ‘반자동 무늬집기’를 고안해 폭 54인치의 신제품을 생산한 것이 풍기인견을 한 단계 발전시키면서 ‘대광직물’이란 회사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 그 때 풍기인견은 주로 옷 안감으로만 사용하든 것을 겉 의류(여름 옷, 원피스, 바지, 이불 등)품이 되면서 수요가 점차 많아져 기계를 50여대로 증설까지 하였습니다. 항상 장사가 잘 된다고 하면 과잉생산이 되니 또 예상되었던 어려움도 생기게 마련이었습니다. 이에 해결코자 소비기호에 맞추려고 제가 직접 고안한 ‘직물지’ 의장등록 특허(97.5)를 특허청장으로부터 받아 신제품을 생산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지요.

* 2000년대 들어와 1분에 700-900회전으로 72-100인치 제품이 생산되는 새로운 기계가 등장과 함께 웰빙 바람을 타고 수요가 늘어나 인견이 풍기특산물로 인정받으면서 인견발달사의 한축을 담당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니 이제는 어디서나 생산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연 옛 경기를 다시 찾을 수 있을는지요?

# 운영 중 가장 어려웠던 일과 현재 상황은?

= “사업이란 앞날이 예측 불허이기에 마음 졸이는 고달픔 항상 있지요. 세태와 인간과의 연관 때문에 여유로운 생활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저도 몇 번의 고비를 넘겼지요. 
하나만 든다면 물품대금으로 받은 어음의 잦은 부도였습니다. 아내가 나를 그 때마다 오뚝이로 만들어 주었지요.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 의류가게만 아들이 맡아 하고 있습니다”

# 아내에게 할 말은?

= “참 고생 많이 하였습니다. 자식들 잘 키워주었고 그리고 저의 꿈을 이룰 수 있게 꼼꼼히 챙겨주었으니 아내는 사업에 일등공신이지요. 이제는 나이가 짐이 되는지 불편한 곳이 생겨서 걱정입니다”

# 보람 된 일과 건강비결은?

= “보람보다는 아픔이 더 많네요. 부모님, 형제동기 만나 뵙지 못한 불효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풍기광복공원 평화통일기원탑 건립기금 천만원, 영덕 이북 5도민 망향탑 건립기금을 도왔더니 매년 참배 통고가 올 때마다 참 잘 했구나 라고 생각하지요. 사람들의 건강은 부모로부터 50%, 자기관리 50%로 봅니다. 비결이라면 소식이요, 아침마다 아내가 챙겨주는 건강음료수이지요”

윤 회장 내외분은 노년기에 꼭 필요한 4수(四守)라는 아내, 건강, 돈, 친구를 갖추고 사는 분이라서 더욱 존경스러웠다.

전우성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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