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 [154] 버드나무숲이 아름다운 마을 ‘장바우(壯巖)’

▲장바우마을 전경

버들에서 꾀꼬리 우는 마을 황조동(黃鳥洞)
무섬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에 금계국 만발

▲장바우표석

문수면 장바우 가는 길

장바우 마을은 농협파머스마켓에서 문수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다가 서천 강변에 있는 마을이다. 영주소방서 앞에서 문수로를 따라 500m쯤 가다보면 도로 우측에 ‘아름다운 장바우’라고 새긴 표석이 나타난다. 그 옆에 ‘문수효마을’ 안내판도 있다. 산섶을 끼고 300m 가량 들어가면 울창한 버드나무숲이 보이는데, 산을 등지고 서천을 바라보는 마을이 장바우다.

지난 4일 장바우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조동선 이장, 김기현 노인회장, 서민정 새마을지도자, 석귀란 탑거리반장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선성김씨 옛 사당

역사 속의 장바우

문수면 적동리 장바우 지역은 태종 13년(14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영천군(榮川郡) 남면지역에 속했다. 조선 중기 무렵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구분할 때 적포리(赤布里) 황조동방(黃鳥洞坊)이라 부르다가 영조 이후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적포면(赤布面) 황조동리(黃鳥洞里)가 됐다.

그 후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적포면(赤布面) 적동리(赤東里)에 편입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을 개편 때 영주군 문수면 적동리에 속했다가 해방 후 적동2리로 분리됐다. 조동선(65) 이장은 “적동2리는 본 마을인 장바우에 15가구, 황조동에 2가구, 탑거리 18가구, 제별에 8가구 등 4개 마을 43가구에 70여명이 산다”고 말했다.

▲탑거리마을

지명유래

1625년경 발간된 최초 영주지에 보면 황조동(黃鳥洞)이 나온다. 강 건너 아치나리는 아천(鵝川)이라고 나온다. ‘황조’는 꾀꼬리다. 당시 이곳 선비들이 꾀꼬리가 버들에서 운다하여 ‘황조동’이라 하고, 강물에 거위가 헤엄치고 논다 하여 ‘아천’이라 했다고 한다.

적동2리는 조선 때 영천군 적포면(赤布面)에 속했다. 탑거리와 적벽(제별) 사이에 ‘적벽암(赤壁岩)’이란 붉은바위가 있어 이 ‘적벽암’을 기준으로 동쪽은 적동, 서쪽은 적서라 했다한다.

‘장바우’는 마을 뒷산 중턱에 우람찬 큰 바위가 있어 ‘장바우’라 부르다가 한자어를 붙이니 ‘장암(壯巖)이 됐다. 지금 ‘제별’이라고 부르는 마을은 원래 적벽암(赤壁巖)에서 유래하여 적벽(赤壁)이라 불렀는데 발음이 변해 제벽(齊壁)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제별’이 됐다. 탑거리는 조선 때 문수원(文殊院)이라는 국가관리 여관이 있던 자리이다. 스님을 원주(院主)로 하였기 때문에 주변에 절도 있고 탑도 있었다. 마을 입구에 탑이 있어 ‘탑거리’가 됐다.

▲황조동 전경

선성김씨와 황조동

장바우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를 황지골이라 하는데 원조 황조동이다. 이곳에 김담의 아버지 김소량(金小良1384-1449)의 묘가 있다. 조선 초 영유현령을 지낸 김소량(1384-1449)은 영주에 사는 황유정(黃有定)의 사위가 되어 예안에서 영주로 와 처갓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이 바로 삼판서고택이다.

이 집은 고려 말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정도전의 아버지)이 살던 집으로 사위 황 판서에게 물려주었고, 공조전서를 지낸 황유정은 그의 사위 김소량에게 물려주었는데 소량의 아들 김담(金淡.1416-1464)이 이조판서가 되어 판서 3명이 살았다 하여 ‘삼판서고택’이 됐다. 김담의 19대 종손 김광호 씨는 “김담 선조 이후 500여년 간 삼판서고택에서 세거해 오다가 홍규(洪奎.1858-1943.15세손) 고조부님이 1880년경 판서공(김소량) 재사가 있는 황조동으로 이거해 왔다”고 말했다.

이 마을 후손 김기현(75.노인회장) 씨는 “무송헌 사당도 이 때 삼판서고택에서 황조동으로 이건하여 모시다가 무섬에 종택과 사당을 새로 마련하여 2007년 위패를 이안(移安)했다”고 말했다.

▲무섬 가는 길

영남만인소의 발상지 황조동

김태환 영주향토사연구소장은 “김소량의 아버지 김로(金輅.1351-미상)가 예안에서 영주로 이거하여 황조동에 처음 터를 잡았다는 설도 있다”며 “황조동은 선성김씨 영주입향 600년사와 함께 한 마을이다. 또 황조동은 영주지역 선비들의 교유(交遊)가 빈번하던 유서 깊은 마을”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또 “1881년 영남만인소의 발상지가 황조동”이라며 “당시 줄포의 정집교, 성곡의 박봉수, 우금의 김정규(두암고택) 등이 1880년 10월 29일 황조동에 모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영남만인소’ 논의를 한 것이 이 사건의 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영남만인소가 뭐냐?”는 질문에 김 소장은 “고종 때 영남의 선비 1만명이 ‘외국문물을 받아들이지 말고 성리학적 질서를 지킬 것’을 주장하는 상소문 사건”이라며 “오늘로 치면 촛불시위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문수효 마을

장암에 ‘장암서원’이 있었다

조동선 이장은 “예전에 효마을 자리에 장암서원이 있었다”면서 “당시 이곳은 인적이 드물고 주변 경관이 좋아 서원이 들어설만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숙종 9년(1683) 당시 영주 유림에서 장암서원(壯巖書院)을 세우고 숙종 17년(1691)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위패를 봉안했다. 홍익한 등은 병자호란(1636) 때 청나라와 화의를 배척한 우두머리로 청나라로 잡혀가 처형당한 ‘병자삼학사’다. 그 후 1758년 보름골(望洞)로 옮겼다.

이남희(54) 문수효마을원장은 “효마을 터가 옛 서원 자리라고 하니 터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선조들이 남기신 효(孝) 정신을 잘 받들어 진정 효를 다하는 요양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호진(85) 어르신은 “장바우는 수백년동안 빗장이 잠긴 마을이었으나 요양원이 생기고 자전거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빗장이 풀리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적벽마을

적벽암의 전설

탑거리와 장바우 사이에 적벽암이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서천의 물줄기가 적벽암에 부딪혀 큰 호수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 곳이 현 영주소방서 남쪽 인듯하다. 당시 갓 쓴 선비들이 이곳 버드나무 숲에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이 무렵 한양조씨 영주 입향조 청하공(琮.1444-1520)이 방갓에 살면서 이곳 풍광이 중국 호북성에 있는 ‘적벽’과 흡사하다 하여 ‘적벽’이라 했다는 전설도 있다. 옛 적벽에 작은 마을이 있다. 탑거리에서 장바우로 가다가 철길로 올라가는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숲속마을이 나온다. 도심 인근 오지마을에 ‘두부랑 국수랑’ 식당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 식당 주인 서민정(52)씨는 “도시인들에게 두메산골의 맛을 선사하기 위해 마련한 식당”이라고 말했다. (☎ 010-4410-8579)

▲장암 버드나무 숲

적동2리 사람들

마을 앞에 버드나무숲이 있다. 조 이장은 “십수년전 하천정비공사 때 버드나무를 베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버드나무를 지켜냈다”고 말했다. 임병수(64) 장암반장은 “버드나무 숲을 잘 보존한 덕분에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게 됐다”며 “버드나무숲 테크로드와 금계국이 만발한 자전거길은 영주의 명물이 됐다”고 말했다.

김경애(61) 전 이장은 “우리마을에 효마을 등 요양원이 들어오고 무섬 가는 자전거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장바우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며 “우리마을 요양원은 현대식 시설, 친환경 음식, 맞춤형 요양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퇴직 후 귀향했다는 홍윤식(76) 씨는 “어릴 적 백사장에서 뛰놀던 추억이 많다”며 “그 때 친구들과 버드나무숲에서 그네를 타고 물고기를 잡고 놀다보면 날이 저물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민병춘(74) 씨는 “장바우는 여러 성씨가 모여 살지만 친형제 같이 우애 있게 지낸다”며 “조동선 이장님과 김기현 노인회장님 그리고 여러 어르신들이 마을을 잘 이끌어 주셔서 늘 화목한 마을”이라고 자랑했다.

이날 오후 조 이장과 황지골에 갔다. 선성김씨 황조동 재사와 사당 그리고 「증자헌대부병조판서행선무랑영유현령김공(贈資憲大夫兵曹判書行宣務郞永柔縣令金公) 김소량의 묘전비」도 살펴봤다. 조 이장은 “어릴적 저의 할아버지와 김광호 종손 할아버지께서 서로 왕래하시면서 교유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탑거리에 들렸다. 석귀란(83) 탑거리 반장을 만났다. 석 반장은 예전에 탑이 있던 자리, 서낭당 동수목 자리, 신작로 하수로 등을 가리키며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석 반장은 “이 길이 일제 때 닦은 신작로”라며 “모두 이 길로 영주로 가고 안동으로 갔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문수면 적동2리 마을 사람들

▲조동선 이장
▲김기현 노인회장
▲서민정 새마을지도자
▲석귀란 탑거리반장
▲임병수 장암반장
▲전호진 어르신
▲홍윤식 씨
▲김경애 전 이장
▲민병춘 씨
▲이남희 효마을요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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