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양정사(황준량 선생이 학문을 수행하고 제자들을 교육했던 곳)

2017년은 금계錦溪 황준량 선생이 나신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을 둘러싼 이야기는 한 시대와 한 문중만이 아니라, 문중을 벗어나 수많은 선비들 사이에서 오랜 기간 동안 회자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선생의 사후, 스승인 퇴계退溪가 선생의 행장行狀을 직접 쓰고, 문집의 편차를 직접 정하였으며, 이산해李山海가 발문跋文을 쓰고, 세 번에 걸쳐 선생의 문집이 간행되었다.
부친 상喪을 당하여 3년 상을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직에 있었다.

시詩에는 산림은거하고 제자를 키우고자 하는 바람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공직 특히 목민관의 길을 중시하였다. 중앙의 권력 싸움이 싫기도 하였지만 가장 큰 역점이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목민관 이력을 보면 신령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로 세 군데의 목민관 밖에 지내지 않았으나 이는 일찍 타계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모친 봉양을 이유로 목민관으로 나선 후 임금이 주요 자리를 제수하여도 중앙직에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고 목민관으로 일관하였으며 5천자에 이르는 유명한 단양진폐소 상소를 하고 실권을 휘두르는 대비(왕의 어머니)를 비판하는 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단양진폐소는 조선 4대 상소라는 평가도 받는다.

선생의 청렴함은 공직자의 처세에 귀감이 되었다. 타계하기 전까지는 가난의 티를 내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을 사람들이 몰랐는데 죽은 후에 공직에 있으면서 사욕을 채우지 않고 있는 재산마저도 학교를 세우거나 주변을 돕는데 썼음을 알고 감탄하였다. 

퇴계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이 타계하였을 때 관을 채울 옷가지가 부족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가난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선생의 가치관이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의 삶의 향상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고 경제적 부에는 초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행정 능력이 탁월하였다. 목민관의 자리를 잠시 지나가는 자리로 생각하여 대과大過없이 지내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삶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백성들에게 부담이 돌아갈 부담을 걱정하여 전임자들까지 쌓여온 무리한 부채문권을 스스로의 절약과 행정의 효율화로 메우고 관련 문건을 소각하였다. 공문서의 소각인지라 자칫 위험할 수 있는데 별로 개의치 않았다. 

선생이 글로 말로 행동으로 보여준 공직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나 해야 할 일은 지금의 공직자들에게도 지침이 된다.

선생은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학교를 확충하고 창건하였다. 벼슬을 바라는 교육 프로그램 중심의 공립학교와는 달리 학문 탐구에 포인트를 두고 사립학교를 창건하였다. 

교육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꽤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바 일찍 타계하였으면서도 증축한 학교만도 공립 3개 학교 사립 1개 학교였으며 창건한 학교는 사립 4개 학교에 이르니 평생을 학교 하나 만든 사람도 드문 시절인지라 그 열정 정도를 알 수 있다.

선생은 47세라는 이른 나이에 타계하였는데 이는 밤낮을 잊은 과도한 공무몰입 때문이었다고 하니 과연 백성을 위하여 생명을 불꽃을 태운 사례이다. 

퇴계는 문인들을 평가할 때 부정적 평가가 많았는데 자주 교유한 사람들 중 유일하게 금계에 대해서만은 긍정적 평을 더 많이 하였는데 이는 목민관으로서의 삶과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선생에 대한 인물 이야기도 있다. 퇴계는 사람들의 인물이 미추에 대해 평하지 않았는데 유독 금계에 대해서만은 잘 생겼다는 말을 남겼다. 이익이 쓴 성호새설에는 선생이 성주목사로 부임하였을 때 한 여인이 첫눈에 반해 숙소로 침입하였으나 선생이 물리친 이야기도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직접 창건하였던 영천 백학서원에는 퇴계 이황과 함께, 안동 분강서원에는 농암 이현보, 파산 류중엄과 함께, 그리고 과거 입격 위주의 소수서원 운영을 비판하면서 그 대척점에 만들어진 풍기 욱양서원에는 퇴계 이황과 함께 배향되어 선비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선생이 세운 옛 학교는 쇠락하였는데 이는 대원군 시절의 서원철폐와 일제강점기 후 기존 우리나라 학교인 향교, 서원, 정사에서 근대교육을 하지 못하게 하고 일제가 만든 학교에서 근대교육을 하게 한 탓이었다. 

다행히 선생이 세운 영주의 금양정사는 영주시의 도움으로 이미 복원이 되어 사람들이 자주 모여 강학의 기회를 갖고 있고, 영천의 백학서원은 일제 강점기 백학서원에서 공부한 독립투사들을 기려 독립운동 유적지로 복원되고 있고, 실학적 관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칠곡의 녹봉서원도 복원 중에 있다. 

모두 국비의 지원을 받아 복원 중에 있으니 선생의 탄신 500주년을 맞이하여 더욱 뜻이 깊다 하겠다.

2017년 현재는 혼란의 시대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혼란의 시대는 전환의 시대일 수 있다. 

사람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한 전환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탄신 500주년을 맞이한 금계 황준량 선생이 남긴 말, 글, 행동은 전환의 시대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글. 황재천 (금계 16대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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