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박승임 사당

올해는 영남(嶺南)의 문호(文豪)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선생의 탄신 5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일찍이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은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 “당대에 사장(詞章)을 잘하는 선비로 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金貴榮)ㆍ윤현(尹鉉)ㆍ이후백(李後白)ㆍ기대승(奇大升)ㆍ박승임(朴承任)이 가장 두드러졌다.” 고 했다.
선생은 중종 24년에 태어나 명종조를 거쳐 선조대를 살다 간 전형적 관료 문인으로 이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타계하기 1년 전까지 벼슬을 하여 대사간에 올랐으며 70수를 누렸다.
그는 가학(家學)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통해 체득한 성리학적 사유 인식을 기반으로 관계에 진출하였다. 조정에 나아가 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만년에는 향리에서 후진 양성과 유풍(儒風)을 진작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영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요 문학인이요 참 스승이었다.

▲묘역전경

▲ 충간(忠諫)의 관료(官僚) 생활
선생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가 중보(重甫), 호가 소고(嘯皐)이다. 아버지는 성균 진사(成均 進士) 형(珩)이고 어머니는 선성 김씨(宣城 金氏)로 김만일(金萬鎰)의 따님이다. 20세에 예천 권씨인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오기(五紀) 따님과 결혼하였다.
선생은 1517년 11월 19일 영천군(현 영주) 두서리(斗西里)에서 태어나1540년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이어서 4월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청요직(淸要職)으로 나가는 지름길인 승문원(承文院) 분관(分館)과 사관(史官)을 거쳐 옥당(玉堂)과 호당(湖堂)에 스승인 퇴계와 함께 선발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자 선생은 『10점소(十漸疏)』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절실하여 임금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다. 이어서 수찬과 이조 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의 명망이 높아지자 당시 세도가인 소윤(小尹)윤원형(尹元衡)의 심복으로 악명이 높았던 진복창(陳復昌)이 그를 농락할 목적으로 만나보기를 청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으며, 그 뒤 소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 예조정랑,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다시 귀향하였다. 상복을 벗은 뒤에는 현풍현감, 1557년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윤원형의 세도가 더욱 심해져 벼슬에서 은퇴하여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힘썼다. 이듬해 풍기군수로 임명되어 치적을 쌓았다.
그 후 군자감정(軍資監正), 판교(判校)를 거쳐 1565년 병조참의에 승진되고, 이듬해 동부승지, 얼마 뒤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569년(선조 2)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1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1573년 도승지, 이듬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1576년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강화부유수·여주목사를 거쳐 1581년 춘천부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83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언사(言事)에 연루되어 왕의 뜻에 거슬려 창원부사로 좌천되었으며, 얼마 뒤 중앙에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만력 13년

▲ 백성을 사랑한 목민관
선생은 1551년(명종 6) 현풍 현감(玄風 縣監)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10여개 고을의 수령을 거쳤다. 경주에서는 치적 제1로 임금의 칭찬을 들었고, 여주에서는 표리(表裏 옷 한 벌의 겉감과 속감)를 하사받았으며, 춘천 부사로 있다가 병환이 나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후배들이 마련해 주는 전별금도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특히 1558년(명종13) 풍기군수로 군(郡)의 재정을 풍족하게 하였으며 업무를 보는 틈틈이 소수서원에 들러 제생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講)하였다.
당시 회헌(晦軒)의 영정(影幀)이 몹시 낡아서 회헌의 영정(影幀)을 개모(改模)하였다. 또한 경주부윤으로 경주 일대의 묵은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관비를 충당하였으며, 조세를 감면하고 부역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강화부(江華府使)를 거쳐 1578년(선조 11) 여주 목사(驪州 牧使)로 전임되어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기천서원(沂川書院)을 건립하고, 부유하면서도 부모 봉양을 방기한 백성을 치죄하여 향풍(鄕風)을 진작시켰다. 1583년(선조 16)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마지막 임지인 창원 부사(昌原 府使)로 좌천되었는데, 류성룡(柳成龍)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해 오자 7언 절구로 된 12편의 가요(歌謠)를 지어 유리하는 백성을 거두고 교화(敎化)를 펴서 선치를 이루라고 당부하였다.

▲친필간찰

▲ 스승의 길을 가다
선생은 후생(後生) 교회(敎誨)에 관심이 많아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서원(書院)이나 향교(鄕校)의 운용과 제생(諸生)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드높았기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을 때나 친상을 당해 고향에 있게 되면 인근 고을의 젊은이들이 문하에서 학업을 닦기 위해 몰려들었다.
선생은 천성이 가르치기를 좋아하여 비록 동몽(童蒙)이라도 배움을 청해 오면 물리치지 않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제자는 서울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지도하기도 하였지만, 사환(仕宦)이 계속되었으므로 교회(敎誨)에 간단(間斷)이 있어 제자 중 퇴계문하(退溪門下)로 보내 수학(受學)시키기도 했기 때문에 양문(兩門)의 제자가 된 이들도 많다.
선생의 문인록(門人錄)에 오른 제자가 52명인데, 영주가 문풍(文風)을 진작(振作)시켜 선비 고을의 명성을 유지하게 된 데는 선생의 공적이 크다. 문인으로는 金玏, 南夢鰲, 金農, 李中立, 李介立, 權斗文, 金蓋國, 金陶, 金隆, 李弘濟, 秦宗吉, 南致亨, 宋福基, 宋福源, 宋潛, 宋漢, 裵應褧, 張汝興, 張汝嵮, 李汝馪, 任屹, 金中淸, 金允欽, 金允思, 金允安, 金正身, 金允誠, 李憎, 琴復古, 安慶喜, 朴欐一, 黃曙, 黃曄, 黃珞柱, 金慶迪, 閔興建, 閔興先, 金天英, 金元亮, 金鳴盛, 權弘啓, 太舜民, 朴艾, 朴逗, 朴涊, 李瑞, 尹欽道, 李良弼, 任仲圭, 任信圭

▲성리유선

▲ 저술을 남기다
선생은 학자로서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먼저 『소고선생문집(嘯皐先生文集)』 은 선생의 문집으로 5책으로 원집은 4권 2책과 속집 4권 2책, 그리고 부록 상하 1책 합 10권 5책이다.
『성리유선(性理類選)』은 선생이 엮은 성리학 책으로 10권 5책이다. 주자의 성리대전 중에 현실적으로 효용성이 높은 내용을 종류별로 8편 70항으로 발췌하여 엮었다.
강목심법은 선생의 편저로 이 책에 담긴 글은 선생이 평생에 걸쳐 학습하였던 송대 학자들의 문헌에서 경세와 도학, 강목과 관련된 언론을 추려내어 8책 17권에 담은 것이다. 『소고선생일기(嘯皐先生日記)』는 필사본 1책으로 시작부분이 기사의 중간 부분인 것으로 보아 앞부분이 산절된 것으로 보인다. 『원접사 일기』와 『소고일기』가 실려 있다. 다음은 선생의 직금체시(織錦體詩)이다.
재청이 금강산 유람을 가며 시를 보내니 운을 따라 지어 보관하였다.
- 직금체[載淸寄詩將遊金剛山次韻以留 織錦體]

마신옥경괘중천(磨新玉鏡밈中天)  새로 갈은 옥경을 중천에 거니         
소구개수진소년(笑口開須趂少年)  웃으며 말하는 것이 소년 때 같네                 
사일낙하명소동(斜日落霞明小洞)  석양에 저녁노을 작은 동네 밝히었고   
근산창수멱경연(近山蒼樹羃輕烟)  가까운 산의 푸른 나무 가벼운 연기가 덮었구나    
화춘려구재수공(花春麗句裁誰共)  꽃피는 봄 아름다운 시구는 누구와 함께 지을까  
설학유종주저연(雪壑幽蹤走底緣)  눈 쌓인 골짜기에 인연 있어 먼 길 걸어가노라     
가근행용종취성(家近幸容從醉醒)  집이 가까우니 조용히 술에 취하고 깨며          
다시차흥호유연(多時此興好留連)  이런 흥이 오래도록 좋게 계속되길 바라노라

새로 갈은 옥경을 중천에 거니
웃으며 말하는 것이 소년 때 같네
석양에 저녁노을 작은 동네 밝히었고
가까운 산의 푸른 나무 가벼운 연기가 덮었구나
꽃피는 봄 아름다운 시구는 누구와 함께 지을까
눈 쌓인 골짜기에 인연 있어 먼 길 걸어가노라
집이 가까우니 조용히 술에 취하고 깨며
이런 흥이 오래도록 좋게 계속되길 바라노라

▲소고대

▲ 소고 선생의 흔적들
유적으로는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향내 유림에서 하망동 원당(元塘)에 건립했으나 후손들이 귀내로 이건한 소고사당(嘯皐祠堂)과 한정에 소재하고 있는 하한정(夏寒亭)과 소고대(嘯皐臺)가 있다.
하한정은 선생이 퇴거해 있을 때 읍내 본가는 관부(官府)가 가깝기 때문에 번잡하다하여 머물렀던 곳이며 소고대는 선생이 평소에 자주 거닐던 곳인 옛 하한정 터에다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대(臺)이다.
또한 1615년(광해군 7)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선생은 향현사(鄕賢祠)제향되어 오다가 다시 1767년(영조 43) 향현사를 귀강서원(龜江書院)으로 승격시켜 제향했다.

▲ 다시 소고 선생을 생각한다
선생은 가학과 퇴계 선생을 통해 체득한 성리학적 사유 인식을 기반으로, 성장하면서는 좀 더 실천적이고 현실적 학문을 공부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그래서 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만년에는 지방의 향리에서 후진 양성과 흥학사문을 정진시켰다. 생애의 절반 이상을 관직에 있었던 그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원리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에 의해 조선 중기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올해는 소고 선생 탄신 500주년이 되는 해로 다양한 추모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은 소고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지난 2월 24일(금) 소고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사업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기념 추모 고유제(告由祭), 기념 학술대회(11월), 시비제막식(11월) 등의 다양한 추모 행사가 진행된다.
글. 김태환 (영주향토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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