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도립 영주도서관 광장의 송상도 지사 추모비

<독립운동>의 사전적인 의미는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나라의 주권 회복 운동’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주권을 찬탈해간 일제의 저명인사를 저격하였거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고문을 받았다든가, 아니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하다못해 만주 벌판을 쏘다녀야 하는 게 일반적인 독립운동가 상이다.

그러나 기려자(騎驢子) 송상도(宋相燾)는 위의 어느 항목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의 사망도 광복 후의 일이니 ‘나라의 주권 회복 운동’에 의해 처형된 것은 아니었다.
국가보훈처의 홈페이지에도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1910년 경술년(庚戌年)에 국권이 일제에게 침탈당한 후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항일투쟁을 하였던 행적을 30여 년간에 걸쳐 전국을 현지답사하며 기록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을 저술하였다.”라고만 되어 있지 독립운동, 민족운동, 민족해방운동, 식민지해방운동, 항일운동, 광복운동, 복국운동, 민족해방투쟁, 민족혁명운동 등 그 많은 별칭 어디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 있는 곳은 없다.

기려수필의 출판마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장남이 원본을 국사편찬위원회에 제공하여 출판이 되었으니 그렇게 본다면 송상도는 일단 다른 독립운동가와는 분리되어 있는 관심 밖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가 정부로부터 1986년에는 ‘건국공로장’, 1990년에는 ‘애국장’을 받게 된다. 1992년에는 묘소를 대전 국립현충원(國立顯忠苑)으로 이장까지 하였다. 2014년에는 그를 추모하려는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고, 도립영주도서관 앞에는 그의 추모비가 서 있다.

2016년에는 서거 70주년을 맞아 ‘통한의 붓’이라는 뮤지컬까지 공연되었다. 지역 인물 주제 뮤지컬이 ‘안양’, ‘정도전’, ‘김담’ 정도이며 이들 모두가 600년을 넘긴 여말선조 인물이란 점에서 비교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이 아직 뮤지컬로 재탄생된 적이 없는 것으로 비추어 본다면 탄생 150주년에도 못 미치는 송상도에 대한 뮤지컬은 어쩌면 특혜시비를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일반적인 독립운동가 형태도 못 갖춘 그가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걸까?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고, 역사학에 치중하여 중국 역사책을 많이 읽었다. 그가 사학에 심취하여 「조선왕조사」 편찬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중국 명나라의 ‘기려도사(騎驢道士)’라는 사람이 명이 멸망한 뒤 자기 이름을 숨긴 채 나귀를 타고 천하를 다니면서 순절한 명말 충신들의 사적을 수집한 행적에 감명을 받아 아예 자신의 호를 ‘기려자’라 칭하고, 한일합병 뒤 30여 년 동안 일제의 눈을 피해가며 전국을 몇 차례나 돌아다니는 고난 끝에 애국지사들의 행적과 사료를 수집하여 「기려수필」을 저술하였다. 

그가 총칼을 들어 무력으로 독립운동을 한다든가, 독립운동 단체에게 군자금을 기부하지는 않았지만,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이시원의 사적부터 고종의 밀사로 파리에 파견된 이상설과 이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매국노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 서울역에서 폭탄으로 일본 총독을 암살하려 했던 강우규,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신출귀몰하게 활약한 김익상,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상해에서 일본 대장을 죽인 윤봉길, 독립군 사령관 김좌진 등 총 233명이나 되는 애국지사들의 활약상을 본인들 대신 샅샅이 수록하였기에 그들의 행적이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자살 폭탄 이상의 실로 간단하지 않은 독립운동을 감행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 지사는 진작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작고 40년 만에야 겨우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을 받았다. 때문에 일경의 눈을 피해 피 묻은 옷과 원고뭉치를 콩 단지에 넣고 땅에 파묻으면서 시아버지를 곁에서 뒷바라지 했던 며느리조차도 애타게 기다리던 건국포장을 보지 못한 채 타계했고, 손자는 빨갱이로 몰려 사망하고, 폐인이 된 증손자도 죽고, 증손부마저 고향땅을 떠났다고 한다. 실로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을 절감하는 대목이다.
늦게나마 33,000여명의 초·중·고·대 학생들과 시민의 성금으로 추모비가 세워졌음에 다소 안도하면서, 이제 기념사업회가 바라는 사당건립 및 생가복원이 조속히 이루어지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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