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흥1동 지나폴박 씨

한국에서, 영주에서 살기를 선택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 결혼 전과 후, 최소 두 국가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 피부로 느낀 영주는 어떠한 곳일까. 정착단계부터 영주의 변화를 바라봐 온 그들에게 물었다. [편집자주]

가족의 배려, 긍정적 생각 어려움 이겨내
다문화가족에 대한 잘못된 사고 변화되길

▲지나폴박 씨

1999년 태국 나콘사와시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풍기새댁 지나폴박(47. 가흥1동)씨. 처음 배운 한국문화와 언어는 생소하고 어렵기만 했다. 가정을 일궈 정착한 영주, 그녀의 긍정적인 사고와 가족의 배려, 도움이 있었기에 문화적 차이를 조금씩 좁혀나갈 수 있었다.

▲한국생활 속으로
“통일교회 사모님이 서울이 고향이어서 표준어로 한국문화와 언어를 4개월 동안 가르쳐 주셨어요. 시부모님이 사투리를 쓰셔서 직접 배우기는 어려웠고 한국드라마를 보고 말을 배웠어요”

단어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워 태국영어사전과 한국영어사전을 놓고 스스로 배워나갔다고 한다. 3~4년이 흐른 즈음에서야 말이 들리기 시작했단다. 서로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녀는 언어 이외에도 다른 문화에 따른 생활방식에 놀라울 때도 있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결혼한 후 어느 날 시어머니가 남편의 바지를 세탁하시는 것을 보고 무척 당황했어요.
태국에서는 어릴 때부터 빨래, 다림질, 청소, 설거지 등은 스스로 배워서 부모님을 돕거든요. 오히려 자녀들이 부모님의 옷을 빨아드리죠”

당시에는 놀라기보다는 시어머니께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단다. 대부분의 집안일을 여자가 혼자 하는 것도 문화의 차이를 느끼게 했다. 태국에서는 집안일도, 밖에 일도 남녀가 같이 한다.

“친정아버지는 군인이신데 집에 주로 많이 계셔서 집안 일과 생활을 맡아 하셨어요.
어머니는 장사를 하셔서 항상 늦게 오셨기 때문에 아버지께 가정살림과 교육을 주로 받았죠”

문화적 차이는 느꼈지만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그녀는 문화가 달랐기 때문에 오는 차이일 뿐이라 그대로 받아들였단다.

▲애틋하고 소중한 아이들
결혼하고 3~4개월이 지나자 주변에서는 임신여부를 그녀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 또한 문화의 차이점을 느꼈단다. 그녀는 “모두의 기대감이 있어서...”라며 웃는다.

6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불안해져 산부인과에 간 그녀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난소에 혹이 있었던 것. 하나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당시 임신 2주차였다.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의사도 자신도 몰랐단다. “수술을 하고 입덧을 했어요. 그래서 수술이 잘못된 줄 알았죠. 걱정에 병원을 찾을 때가 임신한지 한 달 된 것을 알았어요. 난소가 하나밖에 없어 걱정했는데 다행이었어요”

9개월 뒤 어여쁜 딸을 낳았다. 2년 후에는 아들도 낳았다. 그리고 다시 하나 남은 난소에 혹이 생겨 제거수술을 했다. 그녀는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해 슬프지 않았단다. 슬픔 없이 행복으로 키운 아이들은 이제 고2, 중3이 됐다.

▲생각을 달리하기
2006년까지 풍기에서 시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녀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될 때쯤 구성공원 근처로 분가했다.

태국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경험하고 스스로 깨닫는 삶을 살아가길 희망한다. 대학을 다녀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은 태국과 한국이 똑같다는 그녀는 공부를 강요하기 보다는 아이들이 자신이 바라고 희망하는 일을 찾아 가길 원했다.

“태국은 내가 있을 때도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는 없었어요. 지금의 한국과 같았죠.
그렇기 때문에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태국어는 먼저 가르치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태국에 자주 가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듣고 말하면서 자신감이 생긴 아들을 볼 수 있어요”

현재 다문화알리미로 활동하는 그녀는 고정관념을 깨우치기 위한 노력에 앞장서고 있다.
사람들은 좋은 마음으로 관심을 갖고 다가서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동남아에서 왔다면 힘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먼저 상처를 줄때도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 외국인 엄마로 인해 겪은 불편함도 있었다는 것을 안다는 그녀는 “참 힘들었을 것”이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동남아 사람들이 모두 힘들게 살아가는 것만은 아니에요. 오히려 행복지수는 높죠. 행복은 많이 가졌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문화와 생각의 차이지요. 이를 알리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거에요”

▲가족 안에서 함께
그녀의 하루는 바쁘게 돌아간다. 영주에서 18년차 주부로 살아가는 그녀는 다문화지원센터를 통해 천연비누 자격증을 취득하고 아로마테라피를 수료했다. 이후 구미와 대구교대에서 다문화 이해교육을, 대구대학교에서 이중 언어 강사에 대한 교육을 6개월간 받았다.

다양한 지원이 많아져 교육을 받고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도 많이 하게 됐다. 받은 만큼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처음 영주에 와서 어려울 때는 남편과 시댁식구가 유일한 내편이었어요. 아기를 낳고 필요한 것도 많고 힘든 시기에 바쁜 남편을 대신해준 것은 가족인 아주버님이었지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고마워요” 그녀에게 한없이 자상하고 좋은 시아버지. 그 모습을 닮은 남편은 지금도 아이들의 손발톱을 깎아주며 애정 어린 모습을 보인다며 고마워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생활해주고 너무 고생했어요. 제가 시집을 잘 왔죠.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해줘요.
앞으로도 영주에서 시부모님과 아이들 모두 같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요”

윤애옥,김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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