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4] 단산면 좌석리 김삼학(100), 권해련(96)부부

10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부인
고령의 나이에도 극진히 보살펴

김삼학 어른을 만나려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로 향했다. 면 소재지를 지나니 저수지에 물은 만수에 가깝고 숲들은 5월의 신록을 자랑한다. 잎이 무성한 100년이 넘은 직한 느티나무가 있고 바로 옆집이 100년을 살아온 분의 집이란다. 텃밭에 잡초를 뽑는 분을 누가 그 나이로 보겠는가?

허리 굽혀 인사를 했더니 반갑다고 방으로 안내했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주름은 찾기 어려운데 접빈의 도리인 양 음료수 한 병을 건네 주신다. 역시 100세를 누구나 사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보청기를 끼고 있어 필문(筆問)으로 대화를 나눴다.

# 백년을 살아오신 과정은? = “1918년에 영주시 단산면 모산(현 옥대 2리)에서 가난한 집안 5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나 10살 때 외가인 영양군 일월면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22세에 권해련(18)씨와 결혼했고 다음해부터 세살 터울로 5남 5녀를 두었지요. 40여년을 살다가 50세 때 다시 단산면 조재기(좌석)에서 10여년, 그리고 시거리(좌석)에서 40여년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일들은? =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요. 가장 큰 것이 빈곤과 전란이었습니다. 배가 고파 눈물을 흘렸던 보릿고개에다 흉년이 들 때마다 주린 배를 송구로 달래야 했지요. 다행히 일월산 산나물이 한 몫을 해주었습니다. 거기다가 부끄러운 말로 산아제한이 없던 시절이라 식구가 늘어나니 빈곤은 더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웃음) “일제강점기시대를 빼 놓을 수가 없어요.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픔과 울분을 겪어 보지 않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배급으로 준 콩깻묵인 대두박(大荳粕)을 대두미(大荳米)라 부르게 했으니까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입대는 면했지만 대신 진남포 비행장 공사장에 끌려갔다가 몸을 다쳐 지금도 허리가 굽은 상태이지요. 또 끔찍했던 6.25동란 때 격전지였던 일월산 밑에 살았으니 오죽했겠습니까?”

# 10남매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셨나요? = “그 때만 해도 자식은 제 먹을 것 타고 난다고해서 겁도 없이 낳았습니다. 재물이 없는 집안에 대신 자식이라도 많이 가져보라는 뜻으로 믿었지요. 호된 경험을 당했습니다. 어른은 배를 조려야했고 아이들은 졸라대니 그 때 송구를 먹고 변을 보지 못해 이중고를 겪었습니다. 공부도 남들같이 가르치지 못 한 것이 부모로서 죄스럽지요. 그래도 각각 다른 개성으로 재롱을 피우니 그게 귀여워 자식 많은 줄도 몰랐고 스스로 배우고 익히며 자라 제 할일 하고 동생들까지 돌봐주었어요. 그 모습이 고마워 60여년을 나름 10남매 뒷바라지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 자녀들 키우신 보람을 느끼시나요? = “요사이 자녀들이 부모한테 불평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렇지만 그런 말을 들어 본적이 없어요. 특별히 가르친 것 없는데도 지금 자신들에게 주어진 몫과 도리를 다하니 그것이 효(孝)인 것 같고 또 손 자녀가 근 30여 명이 되니 이것도 복이지요. 오늘도 막둥이 딸이 군 입대한다는 아들을 데리고 이 할아버지한테 인사하러 온다니 기다려집니다”

# 78년을 해로해 오신 두 분의 금실은? = “벌써 78년이라고요. 첫날 밤 아무 말도 해보지 못하고 잠잤던 기억만 납니다. 맏아들 놓고 그 때 둘이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두 바퀴로 끄는 수레가 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또 신앙인이기에 지금까지 서로 언짢은 말은 안하고 살아 왔고 자식들에게도 좋지 않은 모습 보여 준 일이 없었던 것이 금실이지요. 아이들을 다 출가시킨 후 둘이 약 20여년 살면서 한 상(床)에 밥 차려 먹고 낮이면 밭에 나가 일하고 밤이면 다리 펴고 잠자며 살았던 것이 어제만 같고 또 꿈만 같네요. 90가까이에서 아내의 험한 손마디를 만져보면서 서로 위로 했던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랬던 아내가 저렇게 안타깝게 누워있으니 걱정이지요”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 지금 편치 않으신 아내에 대해? =“10년 전 어느 날 중풍으로 쓰러져 몸 한편을 못 썼어요. 그 때 큰 병원에 갔으면 결과가 어떨지 모르지요. 촌에서 오가며 치료만 했으니 지금 저 현실을 불러 온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오랫동안 침대생활로 등에 상처도 나고 팔다리도 임의로 움직일 수 없어 나와 요양사가 부축하지 않으면 돌아 누울 수도 없지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보기에 참 딱합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한 번 나서 살다가 죽기 마련이지만 헛된 생각인 줄 알면서도 아내의 병에는 왜 이렇게 원망이 많아집니까? 하루 세번 밥 먹이고 대소변 받아내고 씻기고 소독을 해 줄 때마다 가련한 마음이 앞섭니다”

# 백세 어른이 96세 아내를 모시기에 어려울 텐데요? = “나에게 이만한 건강을 준 것은 아내의 몸을 돌보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밥을 해 먹은 지는 거의 10년이 되었습니다. 근간 요양사가 와서 청소, 세탁, 간호 등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지요. 아내를 위한 일은 나의 몫입니다. 자식에게 맡기거나 요양원에도 안 되지요. 젊었을 때 부부의 정이나 약속이 늙었다고 변할 수 없고 또 자식들도 자신들이 할 일이 따로 있는데 내가 있는 한 자식들에게 맡길 일도 아니지요. 부부간의 해야 할 일은 끝이 없고 목숨 다 할 때까지라 봅니다. 저렇게 몸이 불편해 말을 못해도 정성 담긴 물 한 모금을 주면 웃으며 넘겨도 언짢은 마음으로 주면 넘기지를 못해요. 아내를 위한 일이 힘들수록 나의 행복으로 승화시키려 합니다. 밖에서 일하고 문을 열고 들어 서면 말은 못하지만 껌벅이는 눈으로 봐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지요. 밤에도 몇 번씩 잠이 깨면 손을 만져 봅니다. 만약 아내가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고독해 질까요. 돌보는 것은 언제까지 기간도 없고 이 목숨 다 할 때까지입니다”

# 하고 싶은 말은? = “축복인지 재앙인지는 몰라도 이제 공간을 비워 줄 나이이지요. 인명은 재천이니 아내가 주어진 명(命)대로 나와 함께 사는 것 뿐입니다. 특히 주위 친척과 이웃 분들이 항상 나를 상노인으로 생각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것에 감사드리고 싶어요.

신앙생활 70여 년이지만 하나님 자녀로서 부족한 점 많은데도 장로라는 소임을 맡겨주신 것에 감사하며 좌석교회가 현재보다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전우성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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