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1]94세, 77년 해로 해온 김교명, 이원해 동갑부부

영주시 지천로 55번길 18-1(휴천동 지천)에 위치한 오래된 고택에 김교명 어른이 사신다.

영주남부초교 옆길을 따라 약 400m을 가면 서편은 경북전문대학, 동편은 현대1차 아파트가 있다. 

그 사이 동산 같은 지형에 소나무 몇 그루가 지난 날 살기 좋은 곳임을 짐작케 한다.

길가 300여 평의 터전을 말끔히 골을 지어 비닐을 씌웠고 세월의 무게만큼 힘겨워 보이는 고가 한 채가 담도 대문도 없어 한가로이 서 있다. 

사랑채 외벽에 향양당(向陽堂) 당호를 단 마루에 올해로 94세, 77년을 해로해 온 동갑부부가 나란히 앉았다.

사전에 연락을 받은 탓인지 기자를 반긴다. 어르신 부부의 말에서 남 다른 인품이 묻어나고 읽고 있던 선현지(先賢誌) 책 한 권을 넘겨 주신다.

어르신은 의성 김씨 시조 석(錫)의 35세손, 평장사공파 파조 춘(椿)의 25세손, 파조의 10세손인 응세(應世)의 4남인 엄의 15세손이다. 입향조 엄의 6세손인 회와공 광호(光鎬)가 9대 방조로 기록돼 있다.

어르신은 “이 집은 회와공(晦窩公)이 270 여 년 전에 12칸 와가로 지어 그 후 사랑채를 다시 손을 봤다”며 “향양당(向陽堂) 현판은 12대(日자成자)조의 호를 따 조부님이 걸었다”고 말했다.

# 94년의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텐데요 =
“일제강점기 중반 1924년에 태어나 보통학교 6학년 때 철도로 수송되는 중일전쟁 참전 일본군 환송이란 이름으로 영주에서 김천역까지 다녀왔을 정도였고 경제적 착취와 창씨개명, 혹독한 시련 속에서 21세 때 1945년 8월 1일 받은 군입대 통지서에 입대일자 8월 20일로 되어있었는데 다행히 8월 15일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 후 6.25동족상잔, 사상전, 정치변혁, 산업사회로 변해 오는 요동쳤던 격동기에 중심축의 세대였다 하면 어떠할까요”

# 어떻게 긴 세월 대처해 살아 오셨을까요 =
“청년기에는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에 14대 주손(胄孫)이 되어 한학 선생님이었던 조부모님과 아버지 2대와 동생 둘, 1941년도 나이 17세에 결혼하여 아이까지 태어나 농사를 지으면서 대가족을 돌봐야했으니 책임이 좀 막중하였지요.

장년기에는 어른들 돌아가시고 4남 2녀의 뒷바라지, 문중사 등에 치중하다보니 앞만 보고 온 셈입니다. 이제 노년기에 능력은 떨어지면서 규모는 작어도 해야 할 일은 더 많아 진 것 같은데 엄한 선고(先考)의 유훈인 효와 우애, 언행신중, 맡은 일에 열심히 일하라는 말씀 새기면서 살아 왔습니다”

# 아내 이원해 여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
“예안 진성 이씨 퇴계 후손으로 어린 나이에 일 많은 남자 만나 결혼해 봉제사 접빈객, 자녀양육, 또 남편에게 불평 없이 고생하며 살아 온 여인입니다. 거기다가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요. 이제는 나이 때문인지 건강이 염려됩니다”

# 어떻게 내외분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지요 =
“오래 산 편이지요. 이 집터가 남산 줄기가 서남으로 뻗다가 남원천 냇물을 만나 멈춘 야산 언덕을 배경으로 앞은 넓은 들판(현 시내)을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자좌오향으로 집을 지어 거주환경이 좋고 앞내 모래사장에서 뛰고 뒹굴면서 여러 운동을 흉내만이라도 낸 덕분이지요.

이(齒)도 본래 이(齒)고 병원도 자주 가는 편은 아닙니다. 화(禍)가 생기면 명상으로 풀고 내외간도 존경과 양보로 살아 온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노력하는 사람이 일찍 죽고 편하게 사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 감사하게 생각 되는 일들은 =
“조부모와 부모께서 참 엄격하셨습니다. 그 훈도로 살아 온 것이 지금까지 큰 보약이 되었지요.

문중 어르신들과 이웃 분들의 도움이 많았고 6남매가 다 잘 하지만 특히 맏아들과 장수면 모전 안동 권씨 가문에서 온 며느리가 지성으로 뒷바라지 해주는 것, 그리고 장손이 대학 한문과를 나와 지금 안동 국학진흥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터뷰를 끝내자 자부께서 “아버님 저녁진지 준비 다 됐습니다”라고 한다.

전우성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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