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흥기(소설가·본지논설위원)

묘비(墓碑)에는 성명과 생몰 연월일, 신분, 행적 등을 새긴다. 돌에 썼으므로 지워지거나 변형되지 않아 비문은 영구적으로 남는다. 학교에서 배운 세계사나 국사의 역사적인 유물을 상기하면 묘비에 글귀를 새기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평소 지어 두었다가 쓰게 한 글귀든, 타인의 손을 빌린 글귀든 세상을 떠나더라도 비문으로써 가족과 친지들, 또는 뭇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싶은 마음은 보편적인 정서일 것 같다. 묘비에 새길 글귀가 아니라도 생애를 마감할 무렵이면 누구나 남기고 싶은 말 한 마디는 있을 것이다.

묘비명이라면 노벨상을 수상한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새긴 글귀가 단연 유명하다. 일상적인 짧은 문장으로 표현했지만 삶에 대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어 거푸 되새기게 만든다. 익살스럽고도 해학적이어서 웃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어제와 오늘, 내일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문학사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우물쭈물하여 한 일 없이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고 말해 겸허한 듯 자신의 생애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유한한 삶이기에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처럼 쉬운 말로 절실하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외 길 기차표」라는 노래 제목처럼 갈 수는 있어도 돌아올 수 없는, 외 길 뿐인 삶을 극명하게 밝혔다.

시간이란 홀로 쉬지 않고 흘러 시나브로 삶의 끝자락에 이르기에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에 누구나 공감이 갈 것 같다. 극작가 버나드 쇼는 문학평론가였으며, 탁월한 연극비평가였다. 많은 편지를 남긴 작가로서도 이름을 남겼다.

한편, 칠년 전에 세상을 떠난 대통령은 고향땅, 봉하마을에 묻혔는데 생전에 ‘묘지 위에 작은 빗돌 하나 세워 달라’고 말해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국정의 책임자였던 만큼 묘비에 새길 행적이 없지 않을 텐데도 작은 비석 하나 세우기를 소망한 것이다.

대통령 가운데 퇴임 후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한 사람뿐이다. 생전의 최고 지위에 걸맞게 사후 그들의 묘소 또한 서민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 땅에 묻힌 그 자리에 작은 비석을 세워 달라던 그는 지도자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인 셈이다.

 묘지 위에 올려놓은 무던하게 생긴 펀펀한 비석에는 대통령이라는 직위와 이름 석 자를 세로로 새겼다. 묘비 바로 앞에 어록 한 구절을 썼지만 비석에는 지위와 이름을 새겼을 뿐이다. 권위주의를 거부하던 생전의 소박한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소설 「적과 흑」을 쓴 프랑스의 스탕달은 비문으로 ‘썼노라. 사랑했노라. 살았노라.’라고 새겼다는데 작가로서 정열적인 창작의욕을 보여준다. 「여섯 개의 나폴레옹」, 「얼룩 끈의 비밀」, 「타 버린 시체」, 「버스카빌가의 개」 등 숱한 탐정소설을 쓴 코난 도일은 ‘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았다’고 자신의 모습을 비석에 새겼다. 탐정 소설가다운 비문이다.

결혼과 이혼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염문을 뿌렸던 빼어난 미모를 지닌 미국의 한 여배우를 두고 어느 작가는 ‘마침내 그녀는 혼자 잔다.’를 비석에 새길 글귀로 제시하여 에둘러 그녀의 삶을 꼬집었다. 아무리 화려한 삶을 누려도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5월5일은 어린이의 건강을 기원하고 미래와 행복을 축복하기 위해 정한 95회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의 창시자이자 아동문학가인 방정환 선생의 동상은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묘소는 망우리 아차산 기슭에 있다. 평장(平葬)한 묘소 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고 쓰인 묘비가 섰다. 묘소 오른쪽에 한글로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라고 새겨진 비석이 따로 있다.

‘아이동, 마음심, 같을여, 신선선’의 ‘동심여선’이 묘비명인데 어린이의 마음, 동심이야말로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신선이라는 뜻이다. 가식과 위선에 익숙한 어른들과 달리 어린이의 마음은 순수하다. 한 때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그의 수필 「어린이 예찬」에는 어린이를 ‘사랑스러운 하느님’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글귀가 있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를 어른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보자는 어린이 운동에 헌신했다. 이어령 교수는 과거 전통사회의 어린이들에게는 장난감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어린이들이 소외되었던 현실을 가리킨다.

동심여선을 비석에 새기게 한, 저 먼 곳에 계시는 방정환 선생이 오늘날의 어린이 생활을 알고도 기뻐하실까. 선생이 살았던 시대에 비할 수조차 없을 만큼 풍요롭지만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행복지수 순위는 OECD 회원국들 가운데 맨 끄트머리이다.

해마다 어린이날이 되면 다양한 행사를 치른다. 하지만 어린이날은 성숙하지 않은 어린이 문화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5월5일 하루가 아니라 일년 내내 어린이들이 어린이날처럼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모의 소유물인양 여겨져 어린이들이 수난을 겪는 시대가 아닌지 어른들은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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