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42]봉현면 오현4리 ‘뒷밭’

뒷밭 마을전경

한국전 최초 주민자원 지게부대 국군지원
소백의 정기 받은 뒷밭, 귀농·귀촌 줄이어

봉현면 뒷밭 가는 길
영주에서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풍기·죽령 방향으로 간다. 안정을 지나 생현고개를 넘으면 죽령과 풍기시가지가 보인다. 여기서 10시 방향으로 보이는 제일 높은 봉우리가 장군봉이다.

오현교차로에서 봉현면사무소 앞을 지나 좌측길로 접어들어 고속도로 지하차도를 통과하면 오현3리 오향골이다. 마을 가운데를 지나 언덕배기로 500여m 올라가면 오현4리 뒷밭이다.

지난 11일 오현4리 뒷밭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김영창 이장, 손익용 노인회장, 황강규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뒷밭의 유래와 장군봉전투 이야기를 듣고 왔다.


 

마을 표석

역사 속의 뒷밭
오현리 뒷밭지역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풍기군에 속했다. 조선 중기 무렵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풍기군 와룡동면(臥龍洞面) 흥인동리(興仁洞里)가 됐다가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조선 8도제를 13도제로 개편할 때 풍기군 와룡면 엄현동(奄峴洞)으로 분리됐다.

1914년 일제(日帝)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봉현면 오현리에 속했다가 해방 후 오현4리로 분리됐다. 1980년 영풍군 봉현면 오현4리, 1995년 영주시 봉현면 오현4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군봉 원경

지명 유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풍기군 노좌리면과 와룡동면을 통합하여 새로운 봉현면을 탄생시켰다. ‘봉현’이란 명칭은 히티재에 있는 저명한 봉정지(鳳停地)의 봉(鳳)자와 여현(礪峴.히티재)의 현(峴)자를 조합하여 봉현면(鳳峴面)이라 했다.

또 ‘오현’이란 지명은 오향골(梧香谷)의 오(梧)자와 엄현동(엄峴洞.엄고개)의 현(峴)자를 따 오현리(梧峴里)라고 칭했다.

지송정과 뒷밭못

그러면 ‘뒷밭은 어디에서 유래됐을까?’ 김영창 이장은 “옛날 계곡 주변에 띠풀(모초茅草)이 많아 ‘띳밭’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해 뒷밭이 됐다”면서 “띠(茅)는 엮어서 도롱이(옛 우비)를 만들기도 하고 제사 지낼 때 모사(茅沙)를 만들어 쓰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홍식(85) 어르신은 “오현4리는 뒷밭 남쪽에 남산내기가 있고, 장군봉 쪽에 갈목재가 있다”며 “갈목재란 주성골로 넘어가는 ‘길목재’란 뜻에서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김갑동(83) 어르신은 “옛날 문경과 충주로 왕래 하는 과객을 숙박시키기 위한 마방(馬房)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됐다는 구전(口傳)이 전해온다”며 “그 시기는 1800년경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김계원 장군묘

“장군봉을 사수하라”
이는 1950년 7월 18일 02시 국군 제8사단장 작전명령이다. 6월 25일 불법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28일 서울을 함락하고, 12사단 선발대가 14일 정오 죽령을 넘었다. 국군 8사단은 풍기 동남쪽 산법동-지동리-동촌동 일대와 서남쪽 장군봉-대촌동-유전동 일대에 V자형 진지를 구축하고 10일간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이날 밤 두산방향으로부터 적의 기습공격을 받은 10연대는 2.36인치 로켓포와 60미리 박격포로 반격했다. 국군은 장군봉으로 올라오는 적과 백병전을 전개하면서 끝까지 장군봉을 사수했다. 그 후 중공(中共) 팔로군(八路軍) 출신 특수부대가 투입되고, 후방 화력 증강으로 23일 새벽 영주를 버리고 옹천으로 철수했다.

격전장 금생기

당시 10일간의 풍기전투는 뒷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는 평가와 함께 성공한 작전으로 기록됐다. 지난해 4월 장군봉 유해발굴 때 양성열(중령) 영주대대장은 “장군봉 전투 때 국군을 지원한 지역주민 자원지게부대는 한국전 최초로 기록됐다”고 말했었다.

이 마을 손익용(81. 당시14세) 노인회장은 “당시 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이 주먹밥과 포탄을 지게에 지고 장군봉으로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면서 “이 무렵 남원다리가 폭파되고, 남산내기의 국군과 엄고개로 올라오는 북한군간 치열한 교전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또 “국군이 철수하자 인민군들이 마을에 왔다. 남자들은 여륵쪽으로 피난가고 부녀자와 아이들만 남았는데 ‘밥해 달라’고 해서 해주자 먹고 갈 때는 영수증을 써 주면서 ‘나중에 이거 가지고 군청에 오면 보상해 주겠다’고 했다”면서 “허허” 웃었다.


 

동수나무

장군봉과 장군묘
도솔봉에서 떨어져 동남으로 뻗은 산줄기는 묘적령, 옥녀봉, 장군봉(730m)으로 이어진다. 장군봉은 형세가 천군만마를 거느린 ‘장군의 위엄’같다 하여 장군봉(將軍峯)이라 했다한다.

지난 9일 현지 답사차 장군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금생기(장군봉 길목)에서 손익용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은 “작년 12월 3일 돌아가신 김계원 장군 묘가 바로 위에 있으니 가보라”고 했다.

차를 돌려 다시 올라가서 장군의 묘를 찾았다. 아직 상석도 묘비도 없다. 장군은 국립묘지로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00m 떨어진 곳에 부친(김길준 장로)의 묘와 동생(김계삼 장군)의 묘도 있다. 이 마을 이복재(69)씨는 “현재 장군봉 아래 별(將星)이 9개 있다”며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23년 영주 풍기에서 태어난 김계원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 당시 육군 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해 김 장군은 병상에서 최순실 일가의 국정농단사건을 전해 듣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많이 걱정했다’고 한다.


 

남산내기

고지대 사과 생산지 ‘뒷밭’
영주하면 ‘사과!’, 사과하면 ‘봉현!’이듯 뒷밭 역시 산천이 모두 사과다. 오현골을 지나서 뒷밭-금생기-갈목재-장군봉으로 오르는 산기슭 양면이 모두 사과원이다. 이순녀(84) 할머니는 “삼척에서 쌀밥 먹으려고 이곳으로 시집왔는데 여기서도 쌀밥 먹기 어려웠다”며 “예전에는 갈목재로 가는 양쪽 벤달이 모두 뽕밭이었지. 지금은 모두 사과밭으로 변했어”라고 말했다.

해발 600m 장군봉 아래에 사는 김재선(60)씨는 “해발 400m 이상에서 생산되는 ‘장군봉표 사과’는 당도가 높고 야무져 최고 등급을 받는다”고 말했다.

서울서 2008년 귀농했다는 이연자(60)씨는 “당시 순흥, 단산, 부석을 두루 돌아다니며 살 곳을 찾다가 뒷밭에 와서 ‘그렇지!’하면서 무릎을 ‘딱’ 쳤다”면서 “여기는 소백의 정기를 오롯이 받을 수 있는 명당이다. 서울, 수원, 창원, 천안 등 귀농이 줄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뒷밭 사람들

뒷밭 사람들
기자가 마을 회관에 도착하니 황강규(62) 부녀회장이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회관 안으로 들어가니 황 부녀회장이 차린 다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나누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권오희(81) 할머니는 “우리 마을은 원주민과 귀농·귀촌하신 분들이 서로 돕고 화합하는 살기좋은 마을”이라며 “우리 마을로 오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데 땅이 없어 못 온다”고 말했다.

권분동(80) 할머니는 “황강규 부녀회장은 10여년 동안 부녀회장을 하면서 매일 경로당 점심을 챙겨주니 고맙고 감사하다”며 “그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했다. 안옥이(78) 할머니는 “예전에 보릿고개를 넘을 때 갈목재로 가는 길은 나무하러 가는 지겟길이었다”며 “지금은 과수원길이 되어 높은 소득을 올리는 부자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마을회관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이복재 전 이장이 옛 신문 한 장을 들고 왔다. 2009년 11월 23일자 영주시민신문이다. 신문을 보니 오현4리 경로당을 소개한 기사다.

이 전 이장은 “오현4리는 동신제, 상조계, 두레, 풋굿을 통해 주민 화합을 선도하는 마을”이라며 “1960년대에는 50여호에 400여명이 살았으나 지금은 34호에 70여명이 산다”고 말했다. 황강규부녀회장은 “회관 옆 수백년 수령의 동수나무(소나무)는 보름달 속 계수나무와 옥토끼를 닮았다”며 “이 소나무는 뒷밭못과 지송정(池松亭)이 어우러져 풍광이 볼만하다”고 말했다.

회관에서 나와 김영창 이장 과수원이 있는 갈목재로 갔다. 김 이장은 “해방 후부터 1970년대까지 양잠산업이 한창일 때 이 지역은 모두 상전(桑田)이었으나 지금은 사과로 교체됐다”며 “자동관수시설, 고밀식, 친환경, 저농약 등 신재배법을 도입하여 색깔좋고 당도높은 사과를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이장이 냉동창고에서 꺼내 준 사과를 한 입 물었다.
‘참 달고 아삭하다’

이원식 시민기자

<봉현면 오현4리 뒷밭마을 사람들>

김영창 이장
손익용 노인회장
황강규 부녀회장
김홍식 어르신
김갑동 어르신
이순녀 할머니
권오희 할머니
권분동 할머니
안옥이 할머니
김재선 씨

 

이복재 전 이장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