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40]풍기읍 동부5리 토성마을

토성마을 사람들

조선 때 풍기군 동부면 동문리, 조선말 토성동
인동장씨 29세 인섭(仁燮) 후손 200년 세거지

풍기읍 토성 가는 길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풍기·죽령 방향으로 가다가 봉현교차로에서 내린다. 오현교차로에서 동양대방향으로 가다보면 도로 우측에 성심요양병원이 보인다.

병원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100여m 들어가면 ‘동부5리 토성마을’ 표석을 만나게 된다. 덕아·명성연립주택 뒤로 보이는 야트막한 산이 옛 토성(土城)이고, 집들은 그 남쪽 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지난달 25일 토성마을에 갔다.

토성복지회관에서 박종한 이장, 박재록 노인회장, 권화숙 전 부녀회장, 장병철 인동장씨 문중대표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만나 토성의 역사와 인동장씨 입향 내력을 듣고 왔다.

토성마을 전경

역사 속의 토성(土城)

영주의 역사문화(최현著.2003) 책에 보면 「고구려 장수왕이 소백산을 너머 풍기·순흥에 이르니 이때가 장수왕 69년(481년)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고 있던 전선에 옛 성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예천 은풍의 상을곡성(上乙谷城), 풍기의 토성(土城), 부석의 임곡성(林谷城) 등은 고구려군의 성이고, 고현성(古峴城.성재), 갈산성(葛山城.장수), 용산성(龍山城.안정)은 신라의 성이다」라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에 「소지왕 11년(489) 가을 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상망동 진우고개)에 이르고, 겨울 10월 호산성(狐山城.영덕지품)을 함락했다(炤知麻立干十一年秋九月高句麗襲北邊至戈峴冬十月陷狐山城)」라는 기록에서 고구려와 신라가 8년간 대치하다 고구려가 영주를 점령하고 영덕까지 남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토성마을 표석

또 풍기지에는 「본래 신라 기목진으로 흙으로 쌓은 옛 성터가 있다(豊基郡 本新羅基木鎭 有土城舊址)」고 기록했다. 또 2007년 동양대학교 문화지킴이동아리 정준상은 “토성현장에서 청동기 무문토기와 원삼국시대 토기편이 여러 점 지표 채집됐다”고 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볼 때 전설로만 전해오던 풍기 토성이 삼국시대 때 실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들이다.

박종한(56) 이장은 “영주시사(榮州市史)에는 풍기토성은 고대에 외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은 토성이라고 소개되어 있다”고 말했다.

동수나무

행정구역의 변천과 토성

풍기는 신라 때 기목진(基木鎭), 고려 때는 기주(基州), 조선 태종 13년(1413)에 기천현(基川縣)이 되고, 1414년 문종의 태(胎)를 은풍 명봉산에 묻으면서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의 기(基)자를 따서 풍기라 하고 군으로 승격했다.

토성 지역은 조선 중기(영조이후) 무렵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풍기군 동부면 동문리(東門里)가 됐다. 1896년(고종33) 조선 말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될 때 경상북도 풍기군 동부면 토성동으로 분리됐다.

1914년 일제(日帝)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풍기면 동부동에 편입됐다가 1973년 풍기읍 동부5리, 1980년 영풍군 풍기읍 동부5리, 1995년 영주시 풍기읍 동부5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정한 토성마을

토성의 지명유래

풍기읍지 지명유래편에 보면 「속칭 토성마을은 옛 풍기군 동부면 동문리였다. 옛 풍기읍성 동쪽에 있다하여 동성리(東城里)라 불렀는데 잘못 전해져 토성리로 되었다는 설과 마을 뒤 덕아산(德峨山.해동지도에는 德加山으로 나온다)의 모양이 토성처럼 생겼다 해서 토성리라고 부른다는 두 가지의 설(說)이 있다」고 했다.

토성이란 지명은 오랜 옛날부터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지만 문헌으로 전하는 기록은 빈약하다.

노인정 윷놀이

인동장씨 집성촌

토성마을은 인동장씨 200년 세거지지다. 토성의 인동장씨(시조:삼중대광신호위장군 장금용)는 중시조 남파공(23세) 학의 후손들이다. 1950-60년대에는 30여 가구가 사는 집성촌으로 번성했다. 이 무렵 지역사회를 선도하는 각계각층의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지역 유림에서도 영향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이 마을 장병철(83) 어르신은 “저의 현조부(玄祖父)되시는 29세 인섭(仁燮.甲子生.丁卯卒 1744-1807) 할아버지께서 합천군 덕곡면 율원리에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현조모(전주이씨) 할머니께서 아들 4형제(용복, 용덕, 용재, 용담)를 데리고 소백산 아래 풍기로 와서 토성에 터를 잡으셨다”고 했다.

토성 정착에 대한 연유를 여쭈니, 장 어르신은 “아마도 십승지를 찾아오셨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고조부 대(代)에서 4형제분(30세손)의 후손이 13가구로 늘어나고, 그 아랫대 32세와 33세에서 크게 번창하여 6.25 전후에는 30가구에 300여명이 살았다”고 말했다.

어르신은 또 “전주이씨 할머니께서 아들 4형제와 힘을 모아 마을을 개척하셨으며, 그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합천 선령(先靈) 곁으로 모셨다”고 말했다.

토성복지회관

선조들이 남긴 흔적

마을 곳곳에 선조들의 청빈한 삶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200년 전 선조들이 살았던 토담집, 판담집이 서너 채 보인다. 두꺼운 토담벽을 뚫어서 낸 광창이며, 문종이를 바른 문살, 뒤안 처마 밑에 세워 둔 지게, 옛 농기구 잔해, 디딜방아 터 등은 선조들이 남긴 귀한 유물들이다.

마을 앞 동수나무 밑에는 금줄을 두른 선돌이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동신으로 모시는 동신석이다. 기자가 ‘동신으로 모시는 분이 누구냐?’고 여쭈니, 박 이장은 “오래 전부터 선돌을 동신으로 모시면서 정월 대보름날 성황제를 올린다”면서 “선돌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기자의 생각으로는 ‘이 마을 성황신은 아마도 이 마을을 개척한 전주이씨 할머니가 아닐까?’라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다. 박재록(77) 노인회장은 “예전에 성황단 자리에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고사하고, 1930년경 서울에서 이사 온 ‘진성이씨’ 선비가 느티나무를 심었고, 마을사람들이 잘 가꾸어 지금은 아름드리 동수목이 됐다”고 말했다.

토담집과 지게

미풍(美風)을 이어 온 마을

장병철 어르신은 “구한말 신교육이 시작되기 전에는 마을 자체로 사랑방서당을 열어 한학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고 말했다.

인동장씨가의 며느리인 권화숙(69) 전 부녀회장은 “인동장씨 토성문중은 어른을 공경하고 제사를 중요시 했다”며 “당시 명절 때는 오전에는 큰집 순으로 차례를 지내다가 오후에는 분산해서 지낼 정도로 세대수가 많이 살았다”고 말했다.

토성의 미풍은 근대로 이어져 60년 전 청년 박재록(당시 18세)은 야학을 열고 문맹퇴취 운동에 앞장섰다. 이 마을 권연옥(80) 할머니는 “당시 박재록씨 댁에서 야학을 열어 20여명이 한글과 셈본 공부를 했었다”며 “일제와 6.25를 겪으면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해 답답해하던 중 글을 알게 되어 기쁨이 컸다”고 말했다.

박재록 씨는 “당시 토성마을은 문맹퇴치, 부엌개량, 소똥치우기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 1962년 8월 국가재건최고회(의장 박정희)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고 말했다.

토담집과 문살

토성 사람들

기자가 토성에 갔던 날 마을 사람들은 경로당에 모여 정월의 마지막 날 기념으로 점심을 함께 했다고 한다. 경로당 사랑방에는 어르신이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박종한 이장은 “우리마을은 70세 이상 노인이 90%로 건강장수마을”이라며 “현재 40호에 90여명이 살고 있으며, 대부분 전통 농업이 많다”고 말했다.

최월성(78) 전 노인회장은 “50년 전 연화봉에서 군복무할 때 풍기초 장정식 선생님과 알게 된 인연으로 2006년 서울에서 토성마을로 귀촌했다”며 “산수가 아름다운 살기좋은마을”이라고 했다. 정태수(85) 어르신은 “예전에 금계천과 남원천이 합류하는 들판에 솔경지가 있었다”면서 “풍기사람들의 소풍지로 사랑을 받았으나 일제가 전쟁물자로 베어갔다”고 말했다.

경로당 안방에는 여러 어르신들이 한방 가득 모여 윷놀이에 화기애애하다. 이점시(86) 할머니는 “토성은 여러 곳에 샘이 있어 물이 풍부했다”고 하면서 “또 마을 앞 금계천은 아이들이 멱감고 고기잡던 놀이터였고, 아낙들에겐 빨래터였다”고 말했다.

토성에서 채집된 토기

김종영(88) 할머니는 “60년 전 토성마을은 초가집만 있었는데 짚으로 이엉 엮어 지붕 이는 일이 가을행사 중 가장 큰일 이었다”며 “이럴 때마다 이웃이 협력하여 큰일을 해냈다”고 말했다.

권옥자(75)씨는 “마을 뒤 덕아산은 봄철이면 아낙네들의 화전놀이 터로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면서 “어느 땐가 과수원이 되었다가 지금은 개인주택이 들어섰다”고 말했다.

윤춘도(77)씨는 “토성마을은 설날 세배하기, 정초윷놀이, 대보름 성황제와 소지올리기, 어버이날 경로행사 등 명절마다 시절마다 미풍양속을 이어가고 있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풍기읍 동부5리 토성마을 사람들>
 

박종한 이장
박재록 노인회장
최월성 전 노인회장
장병철 어르신
권화숙 전 부녀회장
정태수 어르신
이점시 할머니
김종영 할머니
윤춘도 씨
권옥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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