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홍중명에 대한 기록 ‘문혈록’ 출판기념회

아들인 홍창보가 기록한 문혈록

그 아들 홍창보가 쓴 아버지의 효행록 최근 펴내
효자 홍중명은 조선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의 조부

조선 후기 효자 홍중명(洪重明 : 1654-1686, 字 仲晦)에 대한 기록인 ‘문혈록(문血錄)’이 국역으로 출판됐다. 풍산홍씨 모당공파종회(영주문중)은 18일(토) 오전 11시 조선 최초 천주교 수덕자인 홍유한 선생유적지인 단산면 구구리에서 문혈록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문혈이란 “피 눈물을 닦는다”는 의미로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번에 출판된 ‘문혈록’은 효자 홍중명의 아들인 홍창보(洪昌輔: 1679-1757, 字 聖文)가 아버지의 효행을 기록한 책이다.

당초 ‘문혈록’은 1729년에 편찬됐으나 출판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해지다 홍중명의 8세손인 홍승경(1876-1947)이 1926년에 출판했다. 이번에 번역 출판된 ‘문혈록’은 당초의 문혈록에다 홍창보에 대한 시문, 홍중명의 유고집을 서편과 전편으로 수록했다.

최근 새롭게 펴낸 문혈록

홍중명은 아버지인 홍만시(洪萬始: 1628-1656)가 3세 때 돌아가셨으므로, 아버지에 대해 애모하는 마음이 컸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리 뛰어났다. 

아버지의 제사에는 전날에 재계를 하고 몸소 제사음식을 차리고 처음 상을 당했을 때처럼 애통해 했다.

친족 간에도 돈독히 지냈으며, 서증조모와 서종조에 대해서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형인 홍중서(洪重瑞 : 1651-1712, 字 伯倫)를 섬김에도 공경하며 화목하게 지냈다.

외삼촌들에 대해서도 공경을 다했으며, 종의 경우에도 부모의 제사를 지내도록 도왔으며, 종이 잘못을 했을 때도 매를 때리기 보다는 그의 부모가 염려한다고 하여 용서했다.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심에 있어서도 지극 정성 다해 병이 들면 의원들이 탄복할 만큼 지극했다고 한다.

홍중명은 20세쯤에 병을 얻어 과거를 포기하고 의리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27세가 되던 1680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했으며, 상을 마친 후에도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상을 당해 몸을 상한 것이 원인이 돼 1686년에 33세로 운명했다.

홍중명의 사후 아들인 홍창보는 1719년부터 선친의 지인들로부터 행장, 묘지명, 묘갈명 등을 받았으며, 어머니인 공인(恭人) 창녕조씨가 1725년에 운명한 후 상을 치르고 1729년에 어머니의 행장 끝에 성호 이익의 서문을 받아 ‘문혈록’을 완성했다.

홍창보의 노력으로 홍중명의 효행이 알려져 1723년(경종 3)에는 200여명의 선비의 연명으로 효자로 정려를 해달라는 상소가 올려졌으며, 이듬해에 효자 정려문이 내려졌다.

단산면 구구구리 홍유한 선생 유적지에 위치한 정려문

이어 1726년(영조 2)에는 통선랑(通善郞) 사헌부 지평에 증직됐으며, 임금의 명으로 정려문(旌閭門)을 세우게 하니 영선도감(營繕都監) 박필광이 효자문(孝子門)을 세우고 예조좌랑(禮曺佐郞) 유여림이 현판을 걸고, 이익(李益)이 기를 찬하였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수덕자인 홍유한(후 개명 유호 : 1726-1785, 호는 농은)은 홍중명 선생의 손자이다.

홍창보의 아들로 풍산홍씨 모당공파의 영주 입향조인 홍유한은 1775년 정려문의 현판(懸板)과 유물(遺物) 등을 가지고 단산면 구구리에 정착했다. 이후 1799년에는 정려문(旌閭門)을 건립하고 현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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