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영주선비 선비의 삶과 흔적
[2016선비신문]간재 이덕홍의 생애와 저술글.강구율(동양대 교수)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6.05.16 13:28
  • 호수 568
  • 댓글 0

<사진설명>
▲간재 진개도
▲간재 침수진목전도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영주가 낳은 인물 가운데 상당히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것은 바로 퇴계 선생의 학문뿐만 아니라 그의 인품이나 생활까지도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이라는 중요한 자료를 저술한 것이고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에 행재소(行在所)에서 올린 상소문인 상행재소(上行在疏)에서 진계도(陣械圖)와 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 귀갑선도(龜甲船圖) 등을 제작해 사용할 것을 진언한 것이다.

특히 귀갑선도의 제작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으로산법도(算法圖)가 있다. 수학에 정통하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으나 간재의 산학(算學)에 대한 깊은 관심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간재는 조선조 학자들의 전통학문인 성리학이나 예학뿐만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과학이나 국방과학에 깊은 관심과 상당한 정도의 인식을 소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간재의 이름과 자는 퇴계 선생이 직접 명명하였다고 한다. 연보에 의하면 퇴계 선생이 한번 보고 마음으로 허락하며 당시에 아직 총각이었는데도 선생의 문하생들이 좌우에서 혹 이름을 부르면 선생이 경계를 두며 말씀하시기를 “이모(李某)는 거인(巨人)이다. 앞날이 심히 원대하니 너희들은 공경히 대우하고 혹시라도 거만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는 그대로 덕홍이란 이름과 굉중(宏仲)이란 자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네는 자네의 이름의 의미를 아는가?”하고 물어 잘 모르겠다고 하니 말씀하시기를 “덕(德)이란 글자는 행(行)을 따르고 직(直)을 따르고 심(心)을 따른 것으로서 곧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고인들이 명명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따라서 하는 것이니 자네는 이를 체득하라.”하고 또 말하기를 “간(艮)은 정지한다는 뜻이니 매우 좋다. 이로써 재(齋)의 이름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간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그의 문집에 실린 연보와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이 찬술(撰述)한 행장(行狀), 그리고 이당규(李堂揆)가 지은 묘갈문(墓碣文)을 참고로 하여 서술하기로 한다.

공의 휘는 덕홍이고 자는 굉중이며 호는 간재이니 모두 퇴계 선생이 친히 지어 주신 것이며 본관은 영천이다. 간재의 7대조 헌(軒)이 처음으로 영천에서 예안의 분천리에 우거(寓居)하였기 때문에 자손들이 그곳에다 터전을 잡고 살게 되었다.

종백조(從伯祖)인 농암(聾巖) 현보(賢輔:1467-1555)가 풍절(風節)과 행의(行誼)로 중종(中宗)과 인종(仁宗), 그리고 명종(明宗) 시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효절공의 아우인 현우(賢佑)는 훈련원습독(訓鍊院習讀)을 지냈고 습독의 아들인 충량(忠樑)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참판공이 당시 영주에 살고 있던 반남박씨 부사직(副司直) 승장(承張)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어 중종 36년(신축년)인 1541년 10월 14일에 남촌(南村) 구룡동(九龍洞)에서 공을 낳았는데 참판공의 장인이자 간재의 외조부인 부사직공은 평도공(平度公) 은(은)의 6세손이다. 다시 말하면 간재는 외가인 영주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안동 사람에서 비로소 영주 사람이 된 것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순수하며 온아하였고 다른 아이들과 장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15세 때에 청량산에서 독서를 하였고 17세 때에 부친이 흥해교수(興海敎授)가 되었기 때문에 흥해를 따라 갔었고 18세(1558) 가을에는 청량산에 거처하면서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1530-1604) 선생에게 고문(古文)을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인 19세(1559) 약관의 나이에 퇴도(退陶)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훈도(薰陶)를 받았고 또 독실하게 외고 익히며 글 뜻을 깊이 생각하였다. 선생께서 그가 어린나이에 뜻이 독실한 것을 아껴서 처음에 뜻을 세우고 추향(趨向)을 바르게 하는 것을 가르치셨다.

학문의 방향을 알게 되자 또 이기(理氣)와 성명(性命)의 깊은 뜻과 수신(修身)하고 처신(處身)하는 요령을 가르쳐서 기대하고 장려하는 뜻이 매우 지성스러웠고 공 또한 독실하게 믿고 앙모하여 받들고 주선하는 데 감히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다.

이후 청량산과 월란암(月瀾菴), 용수사(龍壽寺), 농운정사(농雲精舍), 도곡(道谷) 등지를 옮겨가며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30세(1570) 되던 해에 양성(養省)하고 서식(棲息)하기 위한 장소로 오계정사(오溪精舍)를 건축하였는데 당명(堂名)과 재호(齋號)는 모두 퇴계 선생에게 품의하여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선생의 명으로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었는데 공은 채침(蔡沈)의 소의(疏義)를 상고하고 연구하여 안배해서 만들었다. 그 크기가 한 자쯤 되고 그 체제가 매우 자세하였다.

12월 초 2일에 퇴계 선생이 병환이 위중해 계당(溪堂)으로 가서 모셨고 초 7일에 선생이 서적을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튿날인 초 8일에 선생이 역책(易책)하였다. 선생이 별세한 뒤에 공은 스승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3년간 심상(心喪)을 하였다. 사실상 간재는 퇴계의 마지막 제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2세(1572)이던 4월에 동문들과 함께 도산(陶山)에서 모여 상덕사(尙德祠)의 건립을 의논하였으며 33세(1573)이던 11월에는 이산서원(伊山書院)으로 가서 퇴계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36세(1576)되던 해 11월에 진청란학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부通辨心圖說辨)을 저술하였다. 38세(1578) 되던 선조 11년에 조정에서 명유(名儒)를 불러 등용하였는데 공이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과 함께 추천되어 집경전참봉(集慶殿참奉)에 제수되었다.

41세(1581) 되던 5월에 창릉참봉(昌陵참奉)이 되었으며 42세(1582) 가을에 풍저창봉사(풍儲倉奉事)가 되었다. 43세(1583) 되던 봄에 현릉참봉(顯陵참奉)에 제수되어 사은(謝恩)하였고 49세(1589) 되던 봄에 통선랑(通善郞)으로 승급되었다. 그해 겨울에 종묘직장(宗廟直長)에 배명(拜命)되었으나 이듬해인 50세(1590) 되던 봄에 종묘(宗廟)의 보기절취(寶器竊取)사건으로 인해 파직되어 평은역(平恩驛)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52세 되던 1592년 임진년 2월에 봉직랑(奉直랑) 사옹서직장(司饔署直長)에 배명되어 사은하였고 4월에 익위사우부솔(翊衛司右副率)이 되었다. 10월에 관동로(關東路)를 따라 11월에 평안도의 용강산성(龍岡山城)에 이르러 왕세자(王世子)를 알현하고 성천(成川)으로 행차(行次)하였는데 밤낮으로 공직(供職)하며 나태하지 않고 더욱 공경히 하였다.

이때에 왕세자에게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란 상소를 올린다. 53세(1593)가 되던 정월에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선조(宣祖)에게 왜구를 방어할 수 있는 대책을 상소하는 상행재소(上行在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에서 유명한 귀갑선도(龜甲船圖)의 제작을 진언하며 바다에는 귀선(龜船)을 사용하고 육지에서는 귀거(龜車)를 사용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3월에 영춘현감(永春縣監)에 제수되어 4월에 부임하였는데 이때는 병란이 일어난 때이고 기근까지 들어 공사간(公私間)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백성들이 굶어서 죽어 가고 있었다. 공이 힘을 다해 구제하니 온 경내에 백성들이 굶어 죽는 근심이 없게 되었다.

54세(1594)가 되던 정월에 특별히 조산대부(朝散大夫)가 더해졌고 이어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승차(陞差)되었으며 겨울에 사부(師傅)로 있던 경퇴재(景退齋) 민응기(閔應祺)와 주역의 괘효(卦爻)의 의미를 토론하였다. 12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을 치르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져서 병에 걸려 56세 되던 1596년 2월 19일에 여차(廬次)에서 별세하였다.

그해 5월 모일에 예안현의 북쪽에 있는 우계(愚溪)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장사 때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시를 지어 보냈는데 “비파 소리 잦아들자 스승님의 탄식하는 소리 누차 들었네.(希瑟屢聞函丈 )”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후 광해군 7년인 1615년에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에 책록(冊錄)되고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吏曹참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50년이 지나 현종(顯宗) 6년인 1665년에 영주의 사림들이 공의 위판(位版)을 오계정사에 봉안(奉安)하였고 숙종(肅宗) 17년인 1691년에 오계정사가 오계서원(오溪書院)으로 승격되었다.

부인은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직장(直長) 남기수(南麒壽)의 손녀이자 진사(進士)인 응건(應乾)의따님인데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아들을 여섯이나 두었는데 장남은 이름이 시(蒔)이고 다음은 입(입), 강(강), 무(무), 위(위), 모(慕)이다.

공이 저술한 책으로는 역학질의(易學質義), 사서석의(四書釋義), 심경질의(心經質疑), 고문전후집질의(古文前後集質疑), 가례주해(家禮註解), 자의(自疑) 등이 있다. 특히 퇴계 선생의 일상 생활하는 언행을 익숙히 살피고 자세히 기록하여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권두에는 1571년에 지은 공의 서문이 붙어 있다.

이 책은 모두 16부 115조항의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1에서는 입학지서(入學之序)에 관한 것 9조, 조존지요(操存之要)에 관한 것 26조, 궁격지묘(窮格之妙)에 관한 것 14조, 송독지근(誦讀之勤)에 관한 것 9조목 등 주로 퇴계 선생의 언행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권2에서도 역시 퇴계 선생의 언행을 주로 하여 저자와의 문답 등을 기록하였는데 산수지락(山水之樂)에 관한 것 8조, 거가지의(居家之儀)에 관한 것 7조,제사지례(祭祀之禮)에 관한 것 2조, 사수취사지의(辭受取舍之義)에 관한 것 6조, 접물지용(接物之容)에 관한 것 6조, 논인물지품(論人物之品)에 관한 것 4조, 논처변지도(論處變之道)에 관한 것 1조, 추서지인(推恕之仁)에 관한 것 4조, 음식지절(飮食之節)에 관한 것 2조, 거향지사(居鄕之事)에 관한 것 4조, 진퇴지절(進退之節)에 관한 것 7조, 임종지명(臨終之命)에 관한 것 6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영주시민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포토뉴스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