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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선비신문]특집-영주의 선비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6.05.16 12:19
  • 호수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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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비의 혼을 심다

안향(安珦 1243-1306) : 본관 순흥. 고려 고종~충렬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초명은 유(裕), 시호는 문성공, 소수서원 제향 인물이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최초로 성리학(주자학)을 도입하여 실천적 유학을 전파한 우리나라 성리학과 선비정신의 시조이다.

그의 사상은 제자인 육군자(권보·우탁·이진·이조년·백이정·신천)를 거쳐 이색·정몽주·이황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도학의 학맥을 형성시켰다.

그는 고려 후기 무신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던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에 의한 명분주의,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 등의 특성을 지닌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으며, 이러한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양성을 통하여 이룩하려 하였다.

또한 그의 제자 추적(秋適, 1246-1317)은 『명심보감』을 편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유가사상에 기반한 인성교육 체계를 만들었다.

안축(安軸 1282-1348) : 고려 충렬왕~충목왕. 본관 순흥.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소수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영주 순흥의 세력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에 진출한 신흥유학자로서 탁월한 재능으로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하였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춘추관 검열, 단양부 주부를 지냈다. 1333년 원나라 제과에도 급제하여 개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339년 충혜왕 때 전법판서, 감찰대부 등을 거치고, 1344년 충목왕 원년에 지밀직사와 첨의찬성사를 거쳐 감춘추 관사가 되어 충렬왕·충선왕·충숙왕 3조의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성리학에 뛰어났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의 작가로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 『근재집』이 있다. (<그림> 죽계별곡 시비)

안보(安輔 1302-1357) : 고려 충렬왕~공민왕. 본관 순흥. 자는 원지(員之), 소수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안축의 동생으로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였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귀국하였다. 전법판서·밀직제학·감찰대부 등을 역임하면서 업무를 공정하게 잘 처리하였다.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으며, 도덕과 문장이 모두 시대의 사표가 되어 문하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목은 이색은 그의 묘지에서 “선생은 성품이 활달하고 사기를 즐겨 읽었으며, 일에 임함에 대체를 좇아 조금도 치우침이 없었고, 문장은 화려함을 버리고 뜻을 전달함을 취할 뿐이었다.”고 하였다. (<그림> 문성공사당)

이황(李滉 1501-1570) : 연산군~선조. 본관 진보.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수), 시호 문순(文純)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주자의 사상을 깊게 연구하여 조선 성리학 발달의 기초를 형성했으며, 이(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였다. 주리론 전통의 영남학파의 종조로 숭앙된다.

그는 풍기군수로 있던 1549년 1월에 경상도관찰사 심통원(1499-?)을 통하여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뜻을 담은 ‘소수(紹修)’로 결정하고 1550년(명종 5) 2월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주세붕(周世鵬 1495-1554) : 연산군~명종. 본관 상주.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시호는 문민공이다.

경남 합천(7세에 칠원으로 이주) 출신으로 풍기군수 재직(1541-1545) 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설립하여 성리학과 선비교육의 뿌리를 확립시켰으며, 사림으로 대표되는 선비정신을 널리 확산하는 데 초석을 다졌다. 또한 『죽계지』를 편찬하여 영주의 지역사에 관한 중요한 사료를 남겨주었다. 소수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2. 선비와 백성의 나라를 세우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 : 고려 충혜왕~조선 태조. 본관 봉화.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아들로 영주의 구성에서 태어났다. 이색(또는 진중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정몽주·이숭인 등과 교유했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강론했으나, 권신 이인임의 세력에 맞서다가 나주로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 밑에 초막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 건국의 기틀을 다지고 한양도성과 경복궁 건설의 초석을 놓았다.

선비와 백성의 나라를 꿈꾸며 불교를 배척하고 재상중심의 정치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이방원과의 대립으로 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되었다. 『경제문감』, 『불씨잡변』, 『심문천답』, 『심리기편』, 『조선경국전』 등을 남겼다.

3.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다

송석충(宋碩忠 1454-1524) : 단종~중종. 본관 야로(야성). 자는 원로(元老), 호는 눌옹(訥翁), 야성 송씨 영주 입향조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1478년(성종 9)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과거를 준비하는 한편 김굉필·최보·박담손·신희연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정지교부계를 맺어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교유하던 인물들이 화를 입어 처벌받게 되자 평소 이들과 왕래하였던 서간과 저술을 강물에 던지고 병을 빙자하여 향리에 내려가 경서와 역사공부에 몰두하였다. 성품이 강건하고 정직하며 명성과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영주 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림> 산천서원 현판)

문경동(文敬仝 1457-1521) : 세조~중종. 본관 남평. 자는 흠지(欽之), 호는 창계(滄溪), 조선초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진유경(진중길의 증손)의 사위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을 거쳐 비안현감, 강원도 도사를 역임하였다.

종부시 첨정으로 승진하여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고 『연산군일기』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삼포왜란(1510) 때 왜적토벌에 공을 세우고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독서를 좋아하고 시문에 능하여 유생들이 다투어 그의 글을 익혔다고 한다. 퇴계의 부인 허씨의 외조부이고(퇴계의 장인은 허찬), 퇴계의 묘갈명이 있다. (<그림> 창계집)

박승임(朴承任 1517-1586) : 중종~선조. 본관 반남.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 퇴계의 문인이다.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예문관·승정원·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을 거쳐 이조좌랑·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소윤의 횡포가 심할 때는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기도 했다.

학식이 풍부하면서도 과묵하여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하였다. 특히 『논어』와 주자서(朱子書)를 탐독하였으며,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해두었다가 스승인 이황에게 질문하여 실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시문에 능하여 한때 많은 시를 지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사람을 천박하고 경솔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를 중지하고, 심학에 주력하여 실천적 수행에 힘쓰면서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성리유선』·『공문심법유취』·『강목심법』·『소고문집』 등이 있다. 영주 구산정사에 배향되었다. (<그림>『강목심법』)

황준량(黃俊良 1517-1563) : 중종~명종. 본관 평해.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퇴계의 문인이다.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로 임명되고, 호조·병조좌랑을 거쳐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1년경 신녕현감 재임시 굶주린 백성들을 잘 구휼하면서 문묘를 수축하고 백학서원을 창설하였다. 성주에서도 영봉서원과 문묘의 중수, 공곡서당과 녹봉정사의 건립을 추진하는 등 교육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영주 우곡서원과 신녕 백학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림> 금양정사)

황효공(黃孝恭 1496-1553) : 연산군~명종. 본관 창원. 자는 경보(敬甫), 호는 구암(龜巖)이다. 1521년(중종 16)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성균전적, 형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황해도사·교리·지평 등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사간원 사간으로 있을 때 나세찬을 탄핵한 일과 생질이 권신들의 미움을 받은 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영주로 낙향하여 구암정사를 짓고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도상학과 역학에 밝아 역범도를 완성하였다. 퇴계와 교유하였으며 퇴계의 묘지명이 있다. 영주 사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림> 역범도)

장수희(張壽禧 1516-1586) : 중종~선조. 본관 인동. 자는 우옹(祐翁), 호는 과재(果齋), 세조 때 적개공신 장말손의 증손이자 문경동의 외손자로 퇴계의 문인이다. 퇴계가 영주 초곡의 허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을 때 6세의 어린아이였지만 직접 책을 가지고 수업하면서 퇴계의 가르침을 받았다.

1547년(명종 4) 소수서원에 입원 수학하였으며, 이산서원 창건의 주된 역할을 하였고 그 일을 주관하는 12년 동안에 규모를 세우고 비용을 보탰다. 음직으로 어모장군을 지내고 형조참의를 증직 받았으며 영주 한천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림> 인동장씨고택)

4. 과학기술과 의술을 구현하다

김담(金淡 1416-1464) : 조선 세종 때의 천문학자. 본관 선성.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이다. 영주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나 1435년(세종 1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정자, 통사랑, 사헌부 감찰, 이조좌랑, 사간원 헌납, 성균관 직강, 홍문관 정자 등을 역임하였다.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당시의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고, 이순지·정인지 등과 함께 『칠정산내편』, 『칠정산외편』, 『태양통궤』, 『태음통궤』 등의 천문역서를 편찬하였다. 특히 기존에 원나라에서 들여온 역서(수시력)는 중국 역법을 기준으로 제작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는데, 그와 이순지 등은 그것을 우리나라 기준에 맞는 역법으로 바로 잡았던 것이다.

정도전의 매부이자 삼판서고택의 두 번째 판서의 주인인 황유정의 외손자로 삼판서고택의 세 번째 주인이 되었다. 영주 향현사(구강서원)와 문계서당(단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세종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의 매부로 알려져 있다. (<그림> 『칠정산내편』)

이덕홍(李德弘 1541-1596) : 중종~선조. 본관 영천.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이다. 영주 남촌 구룡동(현재의 장수면 호문리)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역학과 산학에도 정통하여 선기옥형(璇璣玉衡)과 혼천의를 제작하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학행이 높은 선비 아홉 사람을 천거할 때 4위로 뽑혔으며, 임진왜란 때는 세자를 따라 성천까지 호종하였다.

이때 상소문에 귀선도를 첨가하여 바다에서는 거북선, 육지에서는 거북거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특히 그가 임진왜란을 만나 거북선의 원형설계도로 추측되고 있는 ‘귀갑선도’를 제작한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주역질의』·『사서질의』·『계산기선록』·『주자서절요강록』·『간재집』 등이 있다. 영주 오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림> 귀갑선도)

이석간(李碩幹 1509-1574) : 중종~선조. 본관 공주. 자는 중임(仲任)이며 영주 뒤세(杜西)에서 태어났다.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 물러났다. 의술로 고명하여 여러 가지 신기한 일화를 남겼으나 아쉽게도 그러한 사실이 남아있는 문헌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명나라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태후의 괴이한 병을 고쳐주고 천하명의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그가 4명의 의원(이석간·채득기·박렴·허임)이 평생에 걸쳐 경험한 임상처방을 근거로 편찬한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은 임상을 통하여 체험으로 익힌 실증적이고 살아있는 한의학 전문서적이다.

특히 여기에 실려있는 300여종의 생약은 그 당시의 약에 대한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당시 민간 의방서로 애용되었던 이 책은 『경험방』·『본초서』·『동의문견방』 등의 출전을 밝혀서 내용을 충실히 하였고, 병의 증세를 우리말로 해석하여 경험방의 고증과 그 지식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남겼다. (<그림> 『사의경험방』)

5. ‘의(義)’로써 나라를 구하다

김개국(金蓋國 1548-1603) : 명종~선조. 본관 연안. 자는 공제(公濟),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박승임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관직은 형조·공조·예조 정랑을 거쳐 강원도사, 충청도사, 옥천군수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는 영주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전란이 끝난 후에는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하였으나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으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임해서는 의리로써 조금도 굽히는 바가 없었다. 집 서쪽에 소나무 백그루가 있어 그 설한에도 푸르름을 사랑하여 집 편액을 만취당이라 하고 호를 삼았다. 영주 삼봉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림> 만취당)

이개립(李介立 1546-1625) : 명종~인조. 본관 경주. 자는 대중(大仲), 호는 역봉(역봉) 또는 성오당(省吾堂)이다. 예천 용궁 대죽리에서 태어나 금당실과 안동 감천에서 우거하다가 만년에 영주 갈미(葛山)에 자리잡고 살았다.

김성일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양친의 간병과 시묘살이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아 그의 효행을 칭송하는 이가 많았다. 1591년(선조 24) 장현광과 함께 유일(遺逸)로 뽑혀 참봉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역 선비들과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는데 부족한 식량과 군량의 조달에 공이 컸다.

이 공으로 수령을 감당할 인재 30명 중의 한사람으로 천거되어 자여찰방과 낭천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때는 종사관 황여일의 천거로 향병대장이 되어 전공을 세우고 영주로 내려와 학문수양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영주 의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림> 의산서원)

배응경(裵應경 1544-1602) : 중종~선조. 본관 성주. 자는 여현(汝顯) 또는 회보(晦甫), 호는 안촌(安村)이다. 박승임의 문인으로 1576년(선조 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정자,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을 거쳐 공조정랑을 역임하였다. 그후 청도군수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하여 싸웠다.

순찰사와 안집사에 보고하여 화약과 총통을 공급받고 무기와 군기를 갖추었다.이에 격문을 지어 관내 선비들에게 참여를 호소하여 군사 천명을 모아 그들을 ‘야격군’이라 하였다. 적진의 형세를 살펴 허점을 찾아 공격하니 적진이 크게 동요하여 왜적 수백 명을 포획하거나 수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공으로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정유재란 때 나주목사로 금산을 수비하면서 이순신의 요청으로 후퇴하는 적의 퇴로를 막고자 하였으나 감사 황신의 무고로 투옥되었다. 그뒤 곧바로 석방되어 영주에 머물면서 류성룡·정구·김륵·김우옹 등의 명유들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천토록』·『안촌집』이 있으며 순흥 봉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김동진(金東鎭 1867-1952) : 본관 선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정산(貞山) 또는 석포(石圃)이다. 구한말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 유림대표 137인의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를 보내어 왜적의 악독한 침략성을 폭로, 조국의 광복을 국제정의에 호소하였다.

이 「파리장서사건」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지만, 옥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관대(冠帶)를 갖추고 꿇어 앉아 경서와 예학을 강론하였다. 옥에서 나온 후에는 제천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 유학부흥과 후진양성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다.

이에 퇴계로부터 이상정·김흥락으로 이어지는 영남의 도학을 충실히 계승하여 학문탐구와 선비정신 실천, 후진양성에 여생을 보냈다. 부석면 상석에 그의 구택과 강학하던 도강서당이 있다. 196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림> 도강서당)

금달연(琴達淵 1874-1914) : 본관 봉화. 1874년 영주 단산면 단곡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순흥에서 김낙임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순흥의 일제 헌병 분견소를 비롯하여 인근 일대의 일군과 접전을 벌이고, 휘하의 포군 수십 명을 거느리고 이강년의 중군장 김상태의 진중으로 찾아갔다.

1908년 이강년 부대의 종사부에서 활약하다가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는 김상태와 함께 의병을 수습하고 그 선봉장이 되어 영주·단양 일대에서 왜군과 교전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7년 왜군에게 체포되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종신징역을 언도받아 복역 중 1914년 10월 21일 옥중 순국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교영(李敎永 1873-1910) : 본관 전의. 1873년 영주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교경(李敎敬)으로 한말 의병항쟁 후기에 경북 북부·강원·충북 지역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의 무력진압과 감시가 심하여 부득이 본명을 숨기고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용한 가명은 이교영·이춘삼·이교철·이용담·이무산 등이다. 그는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 등 일제의 각종 침략조약에 반대하였고, 일제 침략자들을 이땅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1907년 의병장 김상한 부대에 참여하였다가 다시 이명상과 함께 3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친일파의 응징에도 주력하여 일진회원이나 한인 밀정을 과감하게 처단하고, 군자금을 거둬들이는 일도 적극 펼쳤다. 1909년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으며,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09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이 큰 타격을 입은 뒤에는 유격전투의 소부대만 존속할 수 있었는데, 이교영은 이강년·신돌석 등이 순국한 뒤에도 잔여 의병을 규합하여 1909년 말까지 소백산 일대에서 유격전으로 크게 활약한 의병장으로 한말 후기 의병과 영주지역 의병항쟁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6. 춘추의 필법으로 역사를 전하다

권두문(權斗文 1543-1617) : 중종~광해군. 본관 안동. 자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이며, 박승임의 문인이다. 1572년(선조 5)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승문원 교검, 사헌부 감찰을 거쳐 칠원현감, 성균전적, 형조정랑, 청도군수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평창군수에 부임하였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평창지역으로 들이닥친 왜군과 일전을 치러야만 했는데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후 영월·원주 등지로 이송되었다가 탈출하기까지 20여일 동안을 적진에 갇혀 있게 되었다.

그는 이에 대한 경과를 『호구록(虎口錄)』이란 기록으로 남겼는데, 여기에는 당시 관민들을 통솔했던 자신의 결연했던 입장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천·영천·금성·간성의 수령을 거쳐 내자시정·통례원정을 역임하였다. 후에 왜란 중에 쌓은 공적을 인정받아 도승지에 증직되었으며 영주 구호서원에 제향되었다. 『남천집』이 있다.

이여빈(李汝빈 1556-1631) : 명종~인조. 본관 우계.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沙)이다. 한우(韓佑)와 박승임 문하에서 경서와 역사, 제자백가서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벽사도찰방으로 나갔으나 노모 봉양을 위해 일년 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황의 문묘종사 반대와 인목대비 폐비를 추진하는 이이첨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그뒤 벼슬을 단념하고 영주 감곡에 은거하여 후진교육에 힘썼다. 1625년 이산서원 원장의 신분으로 고을 선비인 박성범·김여욱 등과 더불어 영주의 사적을 수집하여 최초의 영주향토지인 영주지(취사본)를 편찬하였다.

그는 영주지 서문에서 지방향토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본군이 한 도의 두 번째 고을이 되어 유능한 인재들이 수없이 배출되었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훗날 본 고을의 민속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채록할 수가 없게 된다면 어찌 한 고장의 흠결이 아니겠는가!”라고 편찬 동기를 밝혔다.

이를 통해 영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그의 자긍심과 그러한 영광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필생의 의지를 잘 읽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영주의 역사를 현단계까지 정리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이여빈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취사문집이 있다. (<그림> 『영주지』)

김응조(金應祖 1587-1667) : 선조~현종. 본관 풍산.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이다. 성혼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대현의 여섯째 아들이다.

영주 봉향리(현재의 휴천동)에서 태어나서 일찍이 권두문, 권호신에게 글을 배우고 16세 때는 류성룡에게서 수학하였다. 1613년(광해 5) 생원시에 합격한 후 광해군의 난정에 과거를 포기하고 장현광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1623년(인조 원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 사간헌 헌납, 홍문관 부교리, 사간원 사간, 승정원 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영주의 향토지인 『영주지』(학사본)를 편찬하여 이여빈의 취사본 『영주지』의 내용을 보강하였다. 안동 물계서원, 영주 의산서원에 배향되었다. 『학사집』·『사례문답』·『산중록』·『변무록』 등이 있다. (<그림> 『국역 영주삼읍지』)

송상도(宋相燾 1871-1946) : 본관 야성(야로). 자는 성소(聖韶), 호는 기려자(騎驢子), 미헌(眉軒), 연파(蓮坡)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권상익·곽종석 등 당대 명유들과 교유하였다. 경학보다는 사학에 힘을 쏟아 역대의 사적을 섭렵하고 조선왕조사의 편찬에 뜻을 두고 있었다.

1910년 일제에 강제 병합되자 우리나라 애국지사의 사적을 편찬하기로 결심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수십 년간 돌아다니며 애국자의 유가족과 친지를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고 당시의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기려수필』을 편찬하였다.

이책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8·15해방까지 애국지사들의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원본은 저자가 정리한 5책과 일부 정리되지 않은 원고로 남아 있던 것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5년에 한국사료총서 제2권으로 편찬 발행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당시의 항일투쟁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칼 대신 붓으로 이룬 민족 자존심의 징표로 그 가치를 높게 인정받고 있다. 1986년 건국표창,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림> 기려수필)

7. 청백리로 선정을 베풀다

황유정(黃有定 1343-?) : 고려 충혜왕~미상. 본관 평해. 초명은 지정(知定), 호는 미균(米균)이다. 안축의 외손자이자 정도전의 매부이다. 고려 말에 초계군수, 형조·공조전서를 지냈다. 초계군수 시절 단정·청렴하여 초계군민과 아전들이 오래도록 그 덕을 기렸다고 한다.

조선 초에 형조·예조판서를 지내고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친 다음 노환을 이유로 낙향하여 영주의 구성 아래 동리의 자택에 ‘소쇄헌’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이곳이 바로 그의 장인인 정운경에게서 물려받은 삼판서고택이다. 그는 이 저택의 두 번째 판서 주인이 되어 다시 외손자 김담에게 물려주었다. (<그림> 삼판서고택)

김륵(金륵 1540-1616) : 중종~광해군. 본관 선성.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이다. 김담의 현손으로 박승임과 황준량에게서 수학하고 퇴계의 문인이 되었다. 30세에 이미 학문과 인격으로 사림에 추중되어 34세로 이산서원장에 추대되었다.

1576년(선조 9)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 전적, 정언을 거쳐 지평을 역임하였다. 1584년 영월군수에 부임하여 군수가 부임하면 갑자기 죽는다는 괴소문을 듣고 단종릉에 제문을 지어 제사하였다. 또한 단종의 사당을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고을의 묵은 폐단 10가지를 들어 ‘영월군진폐소’를 올려 민생을 안정시키자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갈 때 군민들이 선정비를 세워 기렸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안집사로 내려가서 선비들에게 국가의 뜻을 알리고 왜적 토벌을 지휘하였다. 명나라 하절사로 가서 일본의 재침 방지를 위한 칙서를 보내게 하였다. 이조참판, 홍문관부제학,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604년 안동 대도호부사에 부임하였다.

이듬해 7월 큰 수재를 입은 안동부를 구제하여 군민들이 송제사적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영주 구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영주 구성 서편에 그가 지은 구학정과 자택이 있었다고 한다. 『백암선생문집』이 있다. (<그림> 『백암선생문집』)

황섬(黃暹 1544-1616) : 중종~광해군. 본관 창원. 자는 경명(景明), 호는 식암(息庵) 또는 돈암(遯巖), 황응규의 아들이다. 1564년(명종 19) 성균관유생이 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한성부참군·해운판관·황해도사·호조좌랑 등을 거쳐 1577년 서천군수가 되었다.

이 때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정언을 거쳐, 사간·집의·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성주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병조참지로서 어가를 호종하고 군량 수운에 공을 세웠으며, 병사모집과 군량공급에 관한 국방정책을 건의하였다. 대사성·부제학·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쳤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그의 매부였던 영의정 류영경이 축출되자 그도 함께 정치적 탄압을 받아 낙향하였다. 은퇴 후에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영주 우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전익희(全益禧 1598-1659) : 선조~효종. 본관 옥천. 자는 자수(子綏), 호는 설월당(雪月堂)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장령 김지복에게 배우다가 류성룡의 문인 정경세에게서 수학하였다. 162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정자, 형조·예조좌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

간관으로 있으면서 권신 김자점의 죄를 탄핵하다 함경도사로 좌천되었다. 이로부터 충청도사·선산부사를 거쳐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지방장관으로 있으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30여년간 관직생활에서 한결같이 청렴·공직하여 물려받은 세업조차 줄일 형편이었기에 만년에는 살림이 궁색할 지경이었다 한다. 영주 방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설월당문집』이 있다. (<그림>『설월당문집』)

정언숙(丁彦숙1600-1693) : 선조~숙종. 본관 나주. 자는 군서(君瑞),호는 검암(儉巖) 또는 수고헌(壽考軒)이다. 162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사옹원 직장, 사헌부 감찰, 호조좌랑을 거쳐 안동판관, 삼가현령, 형조좌랑, 영덕현령 등을 역임했다.

그는 관직생활 동안 공정함을 지켜 사사롭거나 치우침이 없었으며, 한결같이 청렴하여 자손을 위해 토지를 장만하는 일이 없었다. 자녀들 혼수차림은 가난한 선비집과 같았고 그 자신이나 자손을 위해 청탁하는 법이 없었다. 1635년 안동판관으로 있다가 원주로 돌아가면서 영주의 경관에 매료되어 줄포에 자리잡아 김응조 등 고을선비들과 교의를 맺었으며 봉강서당을 지어 후손들 교육에 힘썼다. 『검암시집』이 있다. (<그림> 봉강서당)

8. 충의로써 절개를 지키다

서한정(徐翰廷 1407-1490) : 조선 태종~성종. 본관 달성. 호는 돈암(遯菴).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47세 되던 해에 계유정란을 일으킨 세조가 불의한 방법으로 조카(단종)의 보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는 대과응시를 포기하고 대구 화원에서 영주의 산이촌(현재의 이산)으로 은둔하여 단종에 대해 절의를 지킨 선비의 삶을 살았다.

만년에는 다시 순흥 등강촌(현재의 단산 동원리)에 몇 칸의 집을 마련하여 백이숙제의 절의를 본받고자 하였다. 당시 효행으로 덕망이 높았던 권득평은 그에게 증여한 시에서 “맑은 표치는 백이의 반열에 못지 않네”라고 칭송하였다. 구고서원에 배향되고 후에 절의로 지평에 증직되었다. 계룡산 숙모전에 단종의 위패를 모시는 곳에 여러 지사들과 함께 배향되었다. 『돈암집』이 있다. (<그림> 돈암집)

안리(安理 1393- ? ) : 태조~미상. 본관 순흥. 호는 서파(西坡). 안향선생의 6대손으로 학문이 깊고 문장에 능하였으나 벼슬에 크게 뜻이 없어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리니 계속 사양하지 못하고 1453년 외직으로 의령현감을 거쳐 예천군수에 나아갔다.

그러나 이때 세조가 단종의 보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순흥으로 낙향했다. 그는 순흥부 누암산 아래 자리 잡아 마을 이름을 대룡산이라 하고, 여기에 서파정을 지어 독서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서울에서 대신의 지위에 있던 집안 조카와 손자들이 그의 누추한 삶을 딱하게 여겨 철마다 맛있는 음식을 보내왔으나 소백산 나물만으로도 분수에 족하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그림> 서파정)

이진(李畛 1420-1484) : 세종~성종. 자는 대여(大汝), 호는 송암(松巖) 또는 두은(杜隱). 약관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144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고, 1445년 이조정랑을 거쳐 단종 때 임파현령을 역임했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하여 벼슬을 던지고 영남으로 내려와 영주 뒤새(杜西)에 숨어 절조를 지켰다. 자손에게도 가학(家學)을 지켜 벼슬에 나가지 말라고 일렀다. 영주 두서길에 그를 숭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지은 경림정(景臨亭)이 있다. (<그림> 경림정)

9. 효로써 백행의 근본을 실천하다

권득평(權得平 1407-미상) : 태종~미상. 본관 안동. 호는 회봉(檜峰). 순흥부 동원(현재의 단산면 동원리)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기특하여 어버이 뜻을 거스름이 없었고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1462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출세에는 뜻이 없고 강학과 어버이 봉양에만 힘썼다. 부친이 중병으로 눈이 멀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하던 중 겨울인데도 복숭아를 먹고 싶다하여 어디서 구할까 생각하며 마을 앞 냇가를 오르내리면서 슬픔에 잠겼다.

이때 얼음 구멍 사이로 푸른 잎이 달린 복숭아 가지가 떠내려 와서 건져보니 정말 붉은 복숭아였다. 그는 하늘이 준 것이라 생각하여 몇 번 절하고 소중하게 갖고 와서 부친께 드렸더니 신기하게도 병이 나았다고 한다. 1465년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이어 당하자 6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시묘살이를 마치고서도 사당에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렸으며 나들이할 때는 반드시 사당에 참배를 했다. 1499년 그의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각을 세웠으나 지금은 비석만 남아있다. 또 그 복숭아의 씨앗으로 풍기군수가 술잔을 만들어 그 하나는 권득평 종가에서 보존하고 제사 때는 그 잔으로 헌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사적은 『삼강행실록』에도 전하고 있으며 단산면 구구리에 후손들이 모신 등영사가 있다.

김용범(金龍範 1755-1794) : 영조~순조. 본관 연안. 자는 천서(天敍), 호는 묵재(默齋). 경학에 깊고 실천에 힘썼으며 문장에도 능하여 약관에 이미 이름을 떨쳤다.

1779년(정조 3) 가을 진성시에 응시하러 떠나자 아직 어린 나이여서 마음이 놓이지 않던 부친이 그를 뒤따라갔는데, 냇물을 건너다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물이 불어 그만 휩쓸리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뒤로 달려가서 울부짖으며 물에 뛰어들었으나 부친을 찾지 못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밤낮으로 강바닥을 헤치며 부친을 찾느라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없어지고 무릎이 헐었으며 몸은 몹시 여위어 뼈만 남았다. 절통한 마음으로 강바닥을 더듬기 꼬박 열달이 지난 이듬해 6월에 다시 큰물이 난 후에야 하류 10리쯤에서 마침내 유해를 찾았는데 시신과 옷이 크게 훼손되지 않은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효성의 감응이라 했다.

10. 묵향에 선비의 멋을 담다

김난상(金鸞祥 1507-1570) : 중종~선조. 자는 계응(季應), 호는 매양(梅陽). 본관 청도. 을사명현(乙巳名賢)으로 불린다. 22세에 퇴계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31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저작에 임명되었다.

그후 사간원 정언으로 있으면서 문정왕후의 명을 어긴 죄로 파직되었으며, 또 1547년(명종 2) 9월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선조 즉위 후 방면되어 기대승의 천거로 학행이 출중한 선비로 발탁, 홍문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조선조 100인 명필록에 등재된 명필가로도 유명하며, 영주 오산서원에 제향되었다. 병산유집이 있다.

강벽원(姜璧元 1859-1941) : 본관 진주. 자가 윤화(允和), 호는 소우(小愚)·노정(蘆亭)·두고산인(斗皐山人)·만학당(晩學堂) 등이다. 시와 글씨에 능했는데 특히 글씨는 인근에는 이미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대외적으로도 명성이 자자하였다.

12~3세쯤 김휘철 문하에서 수학하고, 안진경미불 등의 필법을 깊이 익혀 보기 드문 일가를 이루었다. 이로써 시·서·화에 모두 능해 이른 바 삼절(三絶)로서의 소양을 모두 갖추었으나, 특히 출중했던 것은 글씨였기 때문에 그는 서예가로서의 명망이 가장 두드러지게 그러났다.

중국의 명류 이헌(李軒)은 그를 미불에 견주면서 중국 삼백년 내엔 이런 글씨가 드물다고 했으며, 중국의 대학자이자 서예가로 당대 최고의 평론가이기도 했던 캉유웨이 역시 안진경과 미불의 골법(骨法)을 얻은 당대 제일의 명필이라고 평했다. 『소우재집』과 『노정서결』이 있다. (<그림> 강벽원 글씨)

11. 평민으로 선비정신을 체득하다

배순(裵純 1534~1614) : 중종~미상. 수철장(대장장이)이며 ‘충신백성’으로 추앙되었다. 사람됨이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으며 집안 교육에는 매우 엄격하였다. 수철장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그릇이 갈라져 있거나 물이 새면 가격을 정직하게 낮추어 판매하였다.

양봉을 매우 좋아하여 벌통이 수십 개에 이르렀는데, 벌을 잘못 죽일까 염려하여 함부로 꿀을 따내지 아니하였고, 반드시 때에 맞게 숟가락으로 그 맑은 것만을 대충 취할 따름이었다고 한다. 예안에 거주할 때 퇴계의 행실을 익히 듣고 성심으로 사모하였는데, 풍기로 이주하여 퇴계의 상에 삼년 동안 심상(心喪)을 하고, 철로 된 상(像)을 주조하여 제사를 올렸다.

선조가 승하하니 74세의 고령에도 삼년복을 입었고, 복을 마치자 담제(담祭)를 지냈다. 풍기군수 이준(李埈)이 수령으로 있으면서 관찰사에게 전보하고 관찰사가 조정에 계문하여 마침내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그가 대장간을 차려서 살던 곳이라 하여 배점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순흥 배점리에 정려비가 있다. 단곡집과 창석집에 열전인 배순전이 수록되어 있다.

<자료 협조: 동양대 한국선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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