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신문이 만난 사람]‘급성 골수성 백혈병(혈액암)’극복한 (주)아이영남 이용만 대표

두메서 태어난 산골소년, 리더십 강한 청년으로 성장
죽음 앞 두려움 극복, 세 아이 멋진 아빠 되는 게 꿈

“앞으로 중소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자체 성장 동력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당장 내일에 대한 설계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이는 (주)아이영남 이용만 대표(43)가 직원들에게 신성장 동력 마련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이 대표는 2012년 대표이사로 취임해 적자로 운영되던 회사를 경영 3년만에 순수익 1억 2천만원을 상회하는 흑자 회사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아이영남의 오늘이 있기까지 이 대표에게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었다. 그 사연을 듣기위해 지난달 27일 오후 아이영남을 찾았다.

▲(주)아이영남은 어떤 회사?
아이영남은 CJ헬로비전의 현장업무를 위탁받은 통신서비스 전문업체로 동산고와 충혼탑 사이에 위치해 있다. 유선방송(케이블TV)의 개통, 서비스, 전선망유지보수, CCTV 설치 등이 주요 사업 영역이다.

사무실을 방문해 이 대표를 찾으니 방금 2층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아, 조금 전 밖에 있던 그 분이로구나’생각하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현관에서 이용만 대표를 만났다. 그는 “볕이 좋아 공원을 산책하고 들어오는 길”이라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좀 안 좋은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사람이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쉬지 못하면 죽는 것”이라며 숨 이야기를 시작으로 탁자에 마주 앉았다.

▲백혈병 진단, 그리고 회복 중
이용만 대표는 2011년 4월 4일 원주기독병원에서 건강진단을 받았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데 담당의사가 잠시 보자고 하더니 “백혈구에 보이지 않아야 할 세포가 보인다”며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그 길로 한양대 구리병원을 찾아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급성 골수성 백혈병(혈액암)’이란 진단을 받았다.

“당시 내 나이 40이고 세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내가 왜?’라는 생각에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그러나 ‘살아야 겠다’는 일념으로 수소문해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로부터 3차에 걸쳐 어렵고 힘든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예후가 안 좋은 상황이 계속됐다. 골수 이식 수술을 위해 골수 일치자를 찾았지만 국내는 물론 외국에도 없었다. HLA가 일치할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은 형제·자매간으로 일치율이 25%, 부모자식 간에는 5% 정도라고 한다. 세 자녀 중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과 HLA가 일치해 그해 10월 26일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수술에 성공해 11월말 퇴원하게 됐다. 그런데 퇴원 이틀 후부터 복수가 차는 등 합병증이 생겨 성모병원에 재입원하게 됐다. 급성 심부전증과 간정맥 폐쇄증 등 골수 이식 환자에게 나타나는 가장 나쁜 증상이 찾아 온 것이다.

의료진들은 소생가능성이 3%도 안 된다며 절망적인 진단을 내렸다. 그래도 가족들에게 ‘살아서 돌아올테니 걱정말라’고 하면서 중환자실로 향했다. 침대에 실려 가면서 눈을 감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없이 자란 세월을 생각하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가 죽으면 어린 3남매는 어떻게 될까’ ‘6살 난 막내는 어버지의 존재를 기억할까’ ‘아니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 갈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다
여러 합병증으로 인해 백혈구 수치가 낮아지고 지혈이 안 되는 등 최악의 상황까지 찾아 왔다. 의료진은 혈액을 묽게 해 주는 ‘헤파린’이라는 약물을 투입해 정맥을 뚫는 치료를 시도했다. 2~3일 시간이 지났다. 담당 의사가 “용만 씨,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헤파린이 혈액을 뚫은 것이다. 1주일을 치료하고 일반 병실로 옮겼다. 그러나 예후가 좋지만은 않았다. 여러 가지 합병증이 몰려 온 것이다. 한쪽 시력이 실명에 가까워지고 청력 또한 상실한 상태가 됐다. 대상포진은 머리쪽으로 전이되어 통증이 동반됐고 폐의 이상으로 얼굴에 검버섯이 피는 등 최악의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삶의 의지가 강한 이용만은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간승리자가 됐다.

이 대표는 “지금 내가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면서 “나는 지금 회복 중”이라고 했다. 그는 ‘투병’이란 말은 절대 쓰지 않고 항상 ‘회복 중’이라고 말했다.

▲아이영남, 입사에서 대표까지
이용만 대표는 2001년 10월 당시 YCN영남방송에 입사했다. 입사한 회사가 2006년 3월 CJ 헬로비전에 매각되면서 고객센터 개념의 CJ 영주·문경·봉화 센터의 관리팀장이 됐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업무 미숙과 경영 부실로 3년 간 적자 운영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2011년에는 병마와 싸우면서 잠시도 경영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2012년 초 재계약을 앞두고 “내가 이 회사를 맡아 좋은 회사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했다. 당시 본사 대표가 “청춘을 바쳐 이 조직을 흑자 조직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고 이 대표는 “직원들과 협력하여 멋진 회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4월 CJ 법무팀 입석하에 아이영남의 대표이사로 취임하게 됐다. 그리고 3년,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각자 사명감을 발휘해 지난해 1억 2천만원의 흑자를 냈고, 올해에도 순수익 1억 이상의 회사로 성장하게 됐다.

▲두메의 아이, 리더십 강한 청년으로
이 대표는 1972년 안동시 녹전면 골매마을에서 태어났다. 누이가 둘이 있고 5남매 중 장남이다. 당시 새마을 사업이 시작될 때였지만 오지마을이라 초가집에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고 한다.

원천초등학교까지 15리를 걸어서 다녔다. 초등 3학년 때 영주로 이사를 와 중앙초에 6개월 정도 다니다가 다시 울산으로 이사를 갔다. 울산 변두리 농가 돼지우리 옆 단칸방에서 여러 식구가 함께 살았다. 그래도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고 공부를 곧 잘해 4학년 2학기 때는 반장이 됐다. 당시 어머니는 5남매를 키우기 위해 큰 대야에 생선을 이고 다니면서 장사를 해 생계를 이었다고 했다. 이 대표는 지금도 그 때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올해 71살이 되신 어머니가 계시는데 효도는 못할망정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만 끼치니 불효막심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 영전 앞에 올 ‘수’를 받은 통지표를 보여드렸다. 그리고 어머니를 졸라 고향 골매로 다시 왔고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해서 팔고 살았지만 형편이 더 나빠져 다시 영주로 이사와 경찰서 뒤 달동네에 단칸방을 얻었다고 한다.

영주초를 졸업하고 영광중, 영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반장으로, 학생회장으로 학생활동을 했다. 1991년 경북전문대학교 세무회계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1992학년도에 학생회장에 출마했지만 투표 전날 운동권 학생이라는 이유로 피선거권이 박탈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92년 전국 대학생 마당놀이에 나가 은상을 받았다. “실력은 1등이었으나 전문대학이라고 은상으로 밀려 매우 슬펐다”고도 했다.

▲새로운 성장 동력 찾는데 주력
아이영남의 회사 슬로건은 ‘고객을 감동시켜라’이다. 고객 만족 단계를 넘어 고객을 감동시킴으로써 더 많은 고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회사가 자체 성장 동력을 찾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며 “지금까지는 CCTV를 구입해 단순히 설치만 해주는 사업을 했지만 앞으로는 자체에서 CCTV를 제조해 직접 설치함으로써 싼 값에 공급할 수 있고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 대표는 또 “우리 회사는 CCTV 설치공사로 연매출 1억 이상 올리고 있으며, 통신 관련 면허가 14종이나 있어 지역에서 수년간 매출 1위에 오른 업체다. 내년에는 전략사업팀을 가동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직원 건강 챙기고 복지에도 최선
아이영남은 영주에 본사를 두고 문경과 봉화에 센터를 두고 있으며 직원은 모두 40명이다. 이 대표는 “직원들의 건강을 챙기는 것도 내가 할 일”이라며 “올해 독감예방 주사 비용을 회사에서 부담했고 내년에는 가족들까지 모두 회사에서 부담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한 금연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금연에 성공한 직원에게는 100만원의 포상금을 주고 있다. 지난 2년동안 금연에 성공한 직원이 7명이나 된다고 했다.

현재 직원자녀에게 고등학교까지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나 앞으로 대학교까지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80여분 동안 긴 이야기를 나눴다. 눈물과 감동의 시간이었다. 이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지금 투병 중이 아니고 회복 중이다”고 하면서 “아이들이 고1(딸), 중2(아들), 초2(딸)이다. 이 세 아이들에게 멋진 아빠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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