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의 달 특집] 영주의 최연소 지원병, 화랑무공훈장 받은 소년병 문창곤 육군 중사

1950년 8월 어느 날, 피난지 대구 길거리에서 모병을 했다. 청년들이 숨어서 뒤로 도망가는 것을 본 소년은 분개했다. 조국의 운명이 눈앞에 있는데 청년들이 도망을 가면 나라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지원을 했다. 모병관이 물었다. “올해 몇 살이야?” “열여섯 살, 중학교 2학년입니다.” “너는 안 된다.” 집으로 가라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는 집으로 가는 척 하다가 뒤로 모병장정들이 서 있는 줄에 숨어들었다. 그래서 받은 군번이 0115061번이다.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일주일간 총 쏘는 훈련을 받았다. 긴박한 상황에서 곧바로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에 투입됐다. 그때 전황은 6월 25일 새벽 4시에 불법 남침한 전선은 다 침범되고 국토의 8%밖에 안 남았다. 팔공산이 마지막 방어선인 보루였다.

산 아래 골짜기에는 인민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죽어도 뺏어야 하고, 죽어도 뺏길 수 없다. 힘이 모자라 M1소총을 끌고 다니며 죽기 살기로 싸웠다. 5일 만에 머리와 손에 적의 포탄의 파편을 맞고 부산 5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1개월 만에 완쾌됐다.

10월2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이 후퇴하는 전선을 따라 원주 치악산과 춘천 금화를 따라가며 추격전을 벌였다. 오성산 조경능선 전투에서 중공군 1명을 생포하여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전투 고지에서 먹던 “소금물 주먹밥이 아직도 먹고 싶다”며 옛날을 회상한다. 군 생활 7년 만에 중사로 제대를 했다. 제대를 하고보니 학교 다닐 나이는 다 끝나버렸다.

이 실화의 주인공은 문창곤(文昌坤)씨(77)다. 지금은 영주시 장수면 두전2리 696번지에서 소를 기르며 산다. 올 봄 구제역으로 자식 같은 한우 100여 두를 땅에 몽땅 묻었다. 지금은 조용히 산다. 서예와 동양화는 어느 경지에 이른 수준급. 부인 박옥선씨(75)와의 사이에 5남매, 딸 둘, 아들 3형제를 두고 있다.

그는 6,25 참전순국지원병 2천 800위 위령제에는 꼭 참석한다. 올해 제14회 합동위령제는 지난 17일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열렸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 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거라.” 전선에서 전우들은 거의 다 죽었다. 다 죽고 나만 사는 것은 죄다.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는 대신 먼저 간 소년병들을 잊지 못한다. “전우야 잘있거라”라는 전우가를 목이 메이게 부르며, 지하에 잠든 순국 소년병들의 명복을 빌면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권상목(權商睦) 영주시지회장(84·육군 중위로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 교환 때 귀환했음)은 “영주의 최연소 소년병이었던 문창곤씨의 애국심”을 자랑했다.

문 씨는 “민주주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숱한 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법은 만들면서 소년병국가유공자법은 61년이 지나도록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며, “지금 젊은이들은 국가관이 부족하고, 국가는 정체성이 없는 교육을 하고 있다”며 이 나라 현실을 가슴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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