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보훈의 달 특집 - 국군과 의용군 모두 경험한 안정면 대평리 김광호옹

아무것도 모른채 끌려간 북한 의용군, 필사의 탈출 국군징집받고 전투참여... 무장공비 토벌도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본지는 6.25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과 국군을 모두 경험한 안정면 대평리에 살고 있는 김광호(83)옹을 만나 63년의 세월이 지난 기억 저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편집자주>

“점심을 먹고 있는데 모이라고 해서 탑 거리(소방서자리)로 나갔더니 미리 모인 인근 마을 주민들과 함께 도락꾸(트럭)에 몽땅 태워져서 군위로 갔습니다” 북한군의 일방적인 승리가 예상되던 1952년 5월, 20살의 청년으로 문수면 적서동 아치날 마을에 살던 김 옹은 영문도 모른 채 주민들과 함께 트럭에 올랐다. 아무것도 모른채 이날 트럭에 오른 것이 김옹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늦게 알고 보니 군위 칠보산이야. 토굴에 가둬놓고 15일 동안 훈련을 받았어. 훈련이래 봤자 아시보 총쏘는 방법만 배웠지만, 빨갱이부대인 의용군이었던 거지. 어딘지도 몰라, 큰 개울을 사이에 둔 산허리에 판 참호 속으로 내몰린 채 보름동안 배운 대로 건너 산등성을 향해 총을 쏴댔지...” 며칠 동안 전투에 참가한 김 옹은 의용군으로 전쟁을 하다가 죽으나 도망치다 잡혀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내 도망을 쳤지만 산을 넘으면서 인민군들에게 바로 잡히고 만다. “부대로 잡혀오니 10여명의 도망병들이 미리 잡혀와 있었고 바로 인민재판이 시작됐어. 재판도 웃기는 것이 부대원들을 반으로 갈라놓고 총살시킬 것인지 살려줄 것인지를 물었고 초범이니 살려주자는 의견이 많이 나오자 충성맹세를 받고 다시 참호 속으로 보내는 거야” 전투를 하면서도 도망갈 기회만 엿보던 김 옹은 다소 느슨한 오후를 택해 탈영을 했고 도망에 성공하면서 10여일 간을 숨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면서 고향 아치날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김 옹은 당시 인민군에게 영문도 모른채 끌려간 것이 지금도 가슴 한켠의 커다란 응어리로 남아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개월후 이번엔 국군의 징집 영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초가을에 돌아왔으니까 석달 조금 넘게 의용군 했을꺼야. 이듬해인 단기 4285년(서기 1953년)5월에 징집영장을 받고 부산으로 가서 집결했지. 그리고 제1훈련소인 제주도로 내려갔어. 8연대 159중대에 배속되면서 96일간 훈련을 받았어요. 내군번은 921622**번으로 제주도 군번이야” 잊혀져 가는 기억을 더듬는 노병의 입가에는 힘이 실려 있었으나 기억해 내는 것 보다 오랜 세월에 묻혀버린 기억들이 훨씬 더 많은 듯 했다.

“8월말 연락선에서 내려 부산에서 곱배(창문 없는 화물열차)를 타고 춘천 보충대에 내렸고 당일 밤에 최전방 화천으로 배치됐어. 하룻밤 전투를 치르고 나면 중대원 180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2~3명에 불과했어. 하지만 사람이 계속 보충이 되니까 밤낮으로 전투는 계속됐고 쏟아지는 총탄사이로 포탄이 계속 떨어졌어. 무슨 폭탄인지 이름은 몰라도 날아오다가 사람 가까운 공중에서 터지는 포탄이 제일 무서웠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당시 전투상황은 지금도 노병의 기억 언저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는듯 했다.

“총성이 멈춘 틈을 타 정신을 차려보면 울창하던 산등성은 흰 속살을 드러낸 민둥산이 되었고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전사자들의 옷가지와 시신의 잔해들이 걸린채 피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지. 또 동료들의 시체들이 계곡을 메우고 있어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어” 밥을 지고 오던 노무자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배고픔을 참으며 죽은 전우들 사이에서 전투자세로 밥 오기를 기다리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김 옹은 사람은 얼마를 굶어야 죽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3개월 열흘 화천전투에 참가했다는 김 옹은 운명의 날 밤에도 머리를 숙인 채 정신없이 총을 쏘고 있는데 뒤통수 쪽에서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파편을 맞아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깨어나 보니 부산 5~6군병원이었다. 부산에서 인사과에 근무하던 생질(누나아들)을 만나면서 공비토벌대에 편입, 무주 구천동과 지리산 등지를 뒤지며 패잔병 잡기에 나섰다는 김 옹은 후방 아닌 후방생활을 했다며 공비토벌에 관한 생생한 경험담을 증언하기도 했다.

“그놈들(공비) 참 독종이야. 신고를 받고 구천동에 가보니 산중턱에 얼마나 큰 굴을 파놓았는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총만 쏘다 왔어. 또 제대 무렵에는 이리(익산시)에 있는 35사단에서 훈련병을 교육시켰지. 이리 훈련소 자리는 본래 공동묘지였는데 우리가 훈련소를 만든 거야~” 계급도 이름도 없는 3개월여의 의용군 생활과 사선을 넘나든 6년의 군생활로 얻은 이등상사(지금의 중사)계급을 달면서 군생활은 마쳤다는 김 옹은 허리와 어깨에 파인 파편자리를 보여주며 “그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군인들 덕분에 지금 좋은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김 옹은 현재 국가유공자로 월 42만원의 연금을 받으며 살고 있다. 김 옹은 1970년도에 인척이 사는 안정면 대평리로 이사를 했고 부인 손분희(73)여사와의 사이에는 2남2녀를 두었지만 현재 모두 출가하고 노부부만이 오붓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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