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사람]이한택(李漢澤) 전 광복회 영주봉화연합 지회장

누구나 한번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들려 독립투사들의 투혼을 그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은 자기자신은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 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고 한다.

목숨을 바쳐 나라는 지켰지만 남겨진 가족과 후손들은 대부분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우리는 이 분들은 방관만 할 것인가? 만약 오늘날 그런 상황이 이 나라에 온다면 이를 선택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독립투사 고(故) 이교영(李敎永) 의병장
이교영(1873- 1910) 의병장은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영주시 가흥동(아지동)에서 태어나 삼수당(三秀堂)에서 공부를 하며 자랐다. 1900년(27세)에 문과, 1904년(31세)에 무과에 각각 급제했다.

당시 국내정세는 1905년(32세)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 체결되어 온 국민은 일제를 규탄하며 조약파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선비 가문에서 태어나 양과를 합격했던 이 의병장은 선비답게 일제야욕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단에 투신하게 된다.

1907년 경북 북부지구에서 활동하던 김상한부대에서 좌익장을 맡았고 이름은 이춘삼(李春三)이라 표기되었으나 이는 곧 이교영 의병장이었다.

이 의병장은 당시 교철(敎哲), 춘삼(春三), 용택(龍澤) 등의 가명으로 불려지며 300여명의 의병들을 지휘하면서 강원도 영월, 충북 영춘 단양, 경북 영천(영주) 풍기 순흥, 예천, 상주 등지에서 활동했다.

특히 1909년 3월부터 10월까지 순흥, 풍기 일대 수차 교전에서 일본군을 사살했고, 안동군 풍산면 사미곡리의 김참봉(金參奉)과 장모(張某)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했다.

예천군 미울리에서 일진회원 홍갈산(洪葛山), 안동 하암탑리에서 의병기밀을 일본군에게 제공한 사람을 잡아 총살시켰다.

1909년 11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공주지방 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1910년 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억울함을 상고했으나 기각되면서 1910년 2월 24일 사형이 확정됐다.

그 자리에서 이 의병장은 “나는 내 목숨을 더러운 너희들 손에 맡기지 않겠다.”며 혀를 깨물어 38세의 아까운 나이로 자결했다. 정부는 순국한 이교영 의병장에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영주독립운동사 90쪽 참조)

▲ 이교영 의병장 가족과 후손의 삶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 의병장은 이용담 여사와 결혼해 남매를 둔 아버지로서 삼수당에서 수학하며 양과(문무)에 합격했다.

현존 유일한 손자인 이한택(李漢澤 75) 씨는 어릴 때 14년간 함께 살아온 일경의 압박에 불구가 된 할머니(이용담, 1951년 사망)에게 들어 온 말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이 의병장은 1907년 아들(이수호 李壽鎬)) 5세때 의병에 참여한 후 일본경찰이 매일 집에 와서 수색하게 되니 그때부터 가족들의 고초는 시작됐다.

없는 사람을 찾아내라고 이용담여사를 강압 고문하여 걷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눈이 실명되어 앞을 못 보았다. 또 잔인하게 마을 26가구와 삼수당까지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이로 인해 집들은 모두 폐가가 되고 마을은 폐동이 되어 버렸다.

한 사람의 의병활동으로 여러 가정과 동리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된 것이다. 이 여사는 아들 이수호(李壽鎬 5세)와 딸을 데리고 떠나야 했고, 가는 곳 마다 문전박대를 당해 걸식생활로 2년을 전전했다.

1909년 11월에 이 의병장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 자결순국 한 후에야 가족들은 겨우 부석면 북지리에 자리를 잡았지만 감시는 계속되었고, 생활상은 비참함 그대로였다.

그렇게 20여년 후 이수호씨와 권돌쇄씨가 결혼하여 3형제를 놓고 이수호 씨는 33세 때 어떤 사람에게 유인되어 장사를 시작, 집을 나간 후 객사(1937)를 당해 시신마저 즉시 찾지 못하는 애통함을 당했다. 그 3형제 중 1남은 조사(早死), 2남은 6. 25때 전사, 3남은 이한택씨였다.

명문가정으로 시집온 이용담 여사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남편의 선비정신을 내조하려다 불구의 몸이 되었고 그 몸으로 아들과 손자를 키우면서 한 많은 생을 1951년 74세로, 권돌쇄 여사는 1983년도에 80세로 두 사람은 독립운동가의 아내와 또 며느리로 피눈물 속에 산전수전 다 겪으며 질곡의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 이 의병장의 손자 이한택
어릴 때 온갖 고난 속에서 생활해온 이씨는 1964년(27세)에 국가공무원에 채용되어 32년간 근무하다가 1995년도에 정년퇴직했다. 재직 중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된 1975년도부터 의병장으로 활동한 할아버지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쉬는 날이면 수소문을 통해 함께 활동한 분의 연고자, 체포된 후 재판내용 자료 등을 수집해 20여 년 간 수차에 걸쳐 서류를 제출한 끝에 1995년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얼마전 까지 광복회 영주 봉화연합회장직을 맡아 왔었고 현재 중앙회 대의원으로서 지역 독립투사들의 활동내용을 더 상세히 조사연구 중에 있다.

이씨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내조하시다가 고문을 당해 불구가 되었고, 그 몸으로 가정을 이끌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하시었는데 그 성스러운 명예 회복은...” 하면서 아쉬운 듯 눈물을 삼킨다.

▲독립투사 의병장 이교영장군 기념사업회
이 의병장은 영주출신으로 일제강점 초창기에 조국을 지키려다 장렬히 순국했다. 이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9년 2월 영주인 74명이 뜻을 모아 기념사업회(회장 송필현)를 결성했다.

현재 이 의병장의 사적을 발굴 보전하고 학술대회 개최 등으로 고귀한 독립정신을 선양할 수 있는 기초단계 작업이 추진 중에 있다. 애국정신실천사례 교육은 국가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사명인만큼 정부의 과감한 지원으로 계획이 성공되어야 한다.

우리는 100년 전 이교영 의병장의 그 애국애족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또 일제 야욕으로 35년간 나라 잃었던 그 슬픔도 누구나 눈만 뜨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그 답을 행동으로 옮겨야 내 조국이 존재하고 우리 국민이 슬픔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길이다.

전우성 시민기자 lkj10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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