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사람] 영원한 소녀 반영교 시인

간밤엔
별무리 속에서
너를 보았고
오늘은
초췌한 풀꽃더미 속에서
또 너를 만났다.

나는 세월을 잊었고
그 잊음 속에서
記憶祭를 올렸는데
이 가을
스산한 바람에 묻어오는
네 목소리
목소리

이 시(詩)는 영원한 소녀 시인 반영교 (74) 시인의 첫 시집에 실린 記憶祭(기억제)라는 제목의 시다. 이 시를 읽으며 ‘어쩌면 시인은 첫사랑을 기억하며 지은 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올해 74세의 시인에게 왜 ‘소녀시인’이란 애칭이 붙어다니는지 안다. 자그마한 키에 희고 결 고운 피부를 가진 시인은 아직도 필자가 첫 사랑 운운하자 소녀처럼 볼을 붉힌다.

반 시인은 풍기가 고향으로 1991년 문학세계에 ‘귀향’ 외 4편의 시로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리고 1995년 첫 시집 ‘하늘과 강’을 냈다.

“반영교 시인은 우리지역 여류시인 1호예요. 등단도 일찍 했고 내가 영주문협지부장 할 때 1995년이지 영주문협 주최로 풍기농협 2층에서 출판기념회를 했어요. 감수성도 풍부하고 할매지만 늘 소녀 같아, 소녀지 뭐”영주문협 박근칠 전 지부장의 말이다.

반 시인은 2007년 두 번째 시집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를 냈다. 시인은 시집에 이런 글을 실었다. “첫 시집을 낸지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놓자니 부끄럽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도록 시를 사랑할 수 있는 정열과 펜을 잡을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반 시인은 두 번째 시집의 시 중에서 ‘꿈’이 마음에 들어 다포(茶布)로 제작했다며 필자에게 한 장 선물한다. 반 시인은 증조부 대부터 ‘반부자’라는 이름으로 이 지방에서 회자되던 부유한 집안의 후예다.

그리고 조부 대부터 일찍이 기독교에 눈을 떠 교회를 짓고, 교회에 봉사하는 장로만도 십 여명을 배출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다. 시인의 동생 중 한 분은 타 지역에서 교회 목사로 있고 시인은 풍기제일교회 권사이기도 하다.

“결혼 전 오계 초등학교와 단산 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어요. 이동식 선생님이 오계초등학교 교감으로 계실 때 날 불러줬죠. 사범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게 인연이 돼 결혼 전 5년간 교편을 잡았어요. 이동식 선생님과는 인연이 깊어요. 동생 장인이 되었거든요. 또 박근칠 선생이 단산 병산학교 교장으로 갔을 때 내가 쓴 일지가 있더라고 말씀하시더군요.”라는 반 시인에게 “선생님, 김남조 시인 닮았다는 얘기 듣지 않으세요?”하니 반색을 하며 “그래요. 권석창 시인도 그런 말을 하던데” 하며 얼굴을 붉힌다.

이동식 선생님과 박근칠 선생님은 아동문학가로 이동식 선생의 동시 ‘개나리 노란 배’, 박근칠 선생의 ‘가랑잎 편지’, ‘나 혼자’가 교과서에 실린 우리지역 대표 아동문학가로 반 시인과는 영주문인협회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반 시인은 23세에 사촌 형부의 소개로 만난 박영기씨와 현재 반 시인이 다니는 풍기 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했다.

“5년 전에 먼저 간 남편은 나보다 5살 위예요. 당시 영주군청에 다녔었는데 성품이 곧고 강직한 양반이라 정권이 바뀌면서 공직생활을 그만 두고 나오는 바람에 내가 숱한 고생 했어요. 없는 살림에 4남매 키우느라 책 외판에 보험, 화장품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보험 하니까. 생각나는데 한 번은 시누이가 부자 집을 소개시켜줬어요. 그 집 앞에 서니 입이 떡 벌어지는 거야. 집이 너무 크고 좋아서죠. 그런 날 보고 우리 시누가 이런 말을 했어요. ‘언니, 기죽을 것 없어. 이 집 주인은 퓌쉬킨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는 사람이니까.’ 하던 말이 생각나네요.” 라며 웃으며 이야기한다.

반 시인은 “초등학교(풍기초등) 4학년 때 교내작문대회에서 특상을 받은 나를 보고 ‘너는 이 다음에 시인이 되거라’하시던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오늘의 내가 있지 않았나 싶네요.”라며 초등하교 6학년 때 받은 누렇게 퇴색된 상장과 졸업장을 보여준다.

‘작문 1등 6학년 반영교. 단기 4283년 풍기공립국민학교장’이라고 한자 세로글로 쓰여 있다. 그리고 지난해 돌아가셨다는 반 시인의 어머니께서 쓰신 일기 같은 가정사 묶음을 보여주는데 그 문체가 예사롭지 않다. 반 시인의 문학적 소양은 어머니께 물려받은 게 분명해 보인다.

“권석창 시인에게 어머니 글을 보여줬더니 ‘문체가 한중록이나 조침문에 버금간다.’라고 칭찬해 줬어요.”라는 반 시인은 지난달 각별히 지낸 고모(반희정. 작고)에게 보낸 청마 유치환의 편지 120편을 거제에서 열린 청마문학제에 참석, 동랑 청마 사업회에 전달했다.

“청마는 고모에게 청하(靑霞)라는 아호를 지어주었어요. 그리고 고모에게 쓴 편지 중에는 ‘사랑을 받은 이보다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니 말입니다. 나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당신이 봄풀처럼 살게 할 것입니다.’ 라고 쓴 것도 있어요.

청마의 유명한 연시 ‘행복’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이 되는데 고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의 첫 구절이 되는 글이 보입니다.”라고 말한다.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전 같이 많은 강의 요청은 없지만 심심치 않게 강의도 가고 애들 4남매 장성해서 사회인으로 저마다의 역할을 잘 하고 있고 아이들(손녀, 손자) 잘 자라고요. 자고나면 살아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드리죠.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시인은 임기도 없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국회의원도 4년 임기가 끝나는데 시인은 늘 시를 읽고 시를 쓸 수 있잖아요.” 책으로 가득한 시인의 집을 나서는데 청마의 시, ‘행복’이 머릿속에 맴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안경애 시민기자 agh3631@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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