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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호(鑑湖)에 부는 바람이 아름다운 인수정(因樹亭)본지 영주 JC 특우회 공동기획 우리 고장의 누와 정 [9] 부석면 감곡리 인수정
   
   

부석면 감곡(甘谷) 마을에 위치한 인수정(因樹亭)은 바람 소리가 아름다운 정자이다.

언제부터인가 인수정 앞엔 수백 년 감실을 지켜온 늙은 느티나무 한그루가 햇살 아래 숨을 죽이며 길다랗게 누워 깊은 침묵의 잠을 청하고 있다.

간간히 바람이라도 한줄기 불어주면 바람정자 난간은 옛주인 생각에 지친 어깨를 들먹인다.
정자의 추녀끝에 살포시 걸린 세월의 흔적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하고 흐르는 세월의 무상함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정자옆 텃밭엔 호미쥔 아낙의 분주한 손놀림이 초여름 감실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잡고 취사(炊沙) 이여빈(李汝빈)의 흔적이 400년을 넘어 다시 오늘 그리워진다.

이곳 감곡(甘谷)은 옛부터 “감실(鑑室)”이라고도 불리어 졌는데 옛날 이 마을 앞에는 “감호(鑑湖)”라고 불리는 못(池)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못에 물이 가득차기를 빌어 그때마다 못에 물이 가득차서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그로 인해 훗날 마을을 감실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감실 마을은 순흥도호부의 2부석의 7동네중 한 곳으로 마구령에서 근원한 임곡천(林谷川)과 미내재(美乃嶺), 자개봉(紫蓋峰)에서 근원한 사문천(沙文川)이 부석에서 합쳐져 동남으로 흘러 낙화암천(落花岩川)을 이루고 있으니 이 물이 감실을 감고 흐른다.

태백과 소백의 양산이 길게 뻗어 봉황이 되어 만나고 낙하암천은 그 아래로 남쪽 10여리를 쉼없이 흘러 감곡에 이르러 산과 물을 평탄하고 온유하게 돌아흐르게 하고 있으니 이곳은 선비들이 터전을 자리잡을 만한 곳이다.

또한 낙화암천의 맑은 물과 우곡, 도탄, 감실, 석남으로 이어진 10여리의 넓은 들판은 감실의 풍요를 상징한다.

바람이 아름다운 바람 정자

바람 정자 인수정은 취사 이여빈이 1600년경 건립하였으나 수차에 걸친 중건과 중수를 거쳤기에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 건물로 보여진다. 인수정은 감실 마을 동쪽을 휘감아 마을 초입에서 멈춘 야산자락 끝에 실개천을 앞에두고 터를 잡았다.

지난날 인수정옆에는 연못이 있었으며, 그 동편 구릉에는 취사종택이 있었는데 지금은 연못과 종택의 흔적 조차 찾아볼수 가없다. 인수정엔 북벽 김홍제, 이여빈, 신야 이인행의 기(記)와 시판에 걸려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이중 북벽(北壁) 김홍제(金弘濟)의 ‘인수정’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당당히 8일간 대궐에 호소한 글이
빛나고 빛나 천추에 큰 의리로 밝았네
밝고 어둡고 일어나고 지는것이 다 분수가 있으니
동강(桐岡)이 어찌 홀로 높은 이름을 천단할까

인수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방형(方形)정자로 좌측은 마루칸이고 우측은 온돌방 칸반, 툇마루를 내밀고 헌함(軒檻)을 돌렸다. 당호인 “인수(因樹)”란 “나무에 기대어 집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몸을 낮추고 숨어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건물의 지붕은 홑처마 팔각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영주지 편찬한 취사(炊沙) 이여빈(李汝빈)

취사(炊沙) 이여빈(李汝빈, 1556~1631)은 우계이씨로 이곳 감곡 마을에 처음 입향한 사람이다. 그는 어릴때부터 글읽기를 좋아했으며 처음엔 한우(韓佑)에게 배우다가 소고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에 들어가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했다.

취사는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선조 28)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찰방(碧沙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병중의 늙은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임하고 몰러왔다.
1610년(광해 2) 성균전적에 승진임명되었으나 사양했으며,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이 권세를 잡으면서 세상이 자못 어지러웠다.

한때 산림(山林)학자로 명망을 띤 정인홍(鄭仁弘)등이 이언적(李彦迪), 이퇴계(李退溪)를 헐뜯고 나서고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였으며, 1613년 봄에는 겨우 8세밖에 되지 않은 영창대군에게 역모죄를 씌워 강화도에 가두고 그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죽인 계축역옥(癸丑逆獄)을 일으켰다.

이이첨 등은 영창대군이 화난의 장본인이라 하여 반듯이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에 반대할 만한 대신들은 모두 파면시켜 버렸으며,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역적을 감싼다하여 위협하니 조정의 관원들 가운데 감히 바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취사는 상중(喪中)이었으나 분연히 그 부당함을 과감히 상소(上疏)했으니 장장 수천자에 달했다.

이 상소를 올린 취사는 7일동안 궐문(闕門)밖에 엎드렸으나 중간에 가로막는 바 되어 임금앞에 닿지 못했다. 취사는 또한 폐비를 주장하는 정인홍과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취사는 겉으로는 유(柔)했으나 속으로는 강직했으며 평소에는 남들과 별반 다름이 없는 듯 했으나 그 의리를 분명히하고 시비를 결단함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이첨의 이러한 전횡에 취사는 의연히 올바름을 지키다 자기혼자만의 힘으로 어찌할수 없는 상항에 다달아 할수없이 물러나 문을 닫고 독서로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취사는 그후 감곡으로 돌아와 숨어 살면서 인수정(因樹亭)을 짓고 글읽고, 시읊으며 전원에 묻혀 생(生)을 마쳤다. 가끔씩 취사는 사제(沙堤: 지금의 봉화 도촌)의 명정암(冥酊巖)을 거닐며 유유자적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시문(詩文)과 의병활동, 처절했던 난리의 상황을 상세히 서술한 “용사록(龍蛇錄)”을 남겼다. 영주의 향토사 연구에 뜻을 두어 만년에 여러분야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다듬어 편찬사업이 거의 이루어져 1625년(인조 3) 이산서원에서 향내(鄕內)관계인사의 모임을 열어 그 심의를 거치고 《영주지》의 서문까지 써놓았으나 간행은 보지 못했다.

취사의 후손들은 이곳 감곡에서 대를 이어 살면서 인수정을 지켜왔다. 이인좌의 난때 순흥의 병장을 역임한 무릉(武陵) 이징도(李徵道), 백은당(白隱堂) 이진만(李鎭萬), 진보 현감을 지낸 이진주(李鎭周), 감호(鑑湖) 이경제(李慶濟)등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현재 이곳 감곡에는 인수정, 백은당, 우계이씨 별묘(別廟), 우계 이씨 재사, 취사종택 등의 유적들이 남아있다.

산림처사들의 흔적은 남아

백은당은 생원 이진만이 서재(書齋)로 건립하였다. 현재 건물은 조선 후기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백은당은 야산자락의 경사진 대지에 자연석 기단을 쌓고 자연석 초석을 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칸반의 민도리집이다. 또 이화원 가옥은 백은당의 종택으로 백은당의 우측에 남향하고 있다.

조선 후기 건물로 남향한 ㄱ자형 안채와 동향한 사랑채가 튼 ㄷ자형으로 앉아 있다.

우계이씨 별묘는 정면 3칸, 측면 칸반으로 구성돼 있고 재사는 취사 이여빈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했는데 종택과 별묘사이의 넒은 터에 동남을 향한 -자형 몸체와 ㄴ자형 아랫채가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취사종택은 감실마을 북쪽 산자락 끝에 동남쪽을 향한 안채, 사랑채와 동북쪽을 향한 옆채가 전체적으로 튼 ㄷ자형으로 놓여있다. 취사의 묘역은 동으로 약 200m거리에 있는 야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이밖에도 “감계서당(鑑溪書堂)”, “낙교재(樂敎齋)”, “열습재(悅習齋)”등의 유적들은 그 이름만 남긴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다.

감호에서 다시 도(道)를 생각한다

오늘 바람 정자 인수정에 올라 도(道)를 생각한다. 나타남에 물들지 않을것을 생각하고 숨은것과 나타남이 같지 아니하니 나타냄에 즐거워하는 사람은 다만 한순간 빛을 발할지 몰라도 그 빛은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나타냄을 즐거이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쌓아둔 까닭에 그 발현(發現)함이 오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후세인들의 사모함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바람정자 인수정 난간에 기대서서 나타냄을 즐거이 하지 않았던 취사와 백은당, 무릉의 삶의 흔적들이 솔바람을 타고 넘실거린다.

물질만능의 시대 세속에 찌든 오늘 나는 백은 이진주를 생각한다.

‘백은(白隱)’이란 호는 “책을 읽고 예술을 하여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천에 힘써 희게 꾸미는 (순수하게 장식하는) 도(道)”를 닦는 일로 오늘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시대에 “백은”의 의미를 통해 자신을 낮춘 영주 선비들의 진솔한 삶의 향기와 순결한 뜻을 깊이 새겨보아야 한다. 해가 느엇 니엇 떨어지는 시간 인수정에 올라 취사의 ‘인수정’ 시 한편 읊어 본다.

서끌고 게을러 좋은 물건 없는데
시냇가 나무는 저절로 줄지어 있구나
나무로 인해 바람 정자를 지어서
시내에 의지해 작은 못을 만들었네
연꽃 향기는 막대와 신에 오고
산 그림자는 명화상(藜床)에 내려 앉았는데
만날때마다 즐거움이 있으니
어찌 모름지기 옥당(玉堂)을 부러워하랴

글. 김태환(金泰煥)
시인,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영주시사편찬위원, 영주문화원 이사, 월간『소백춘추』편집국장, 영주문화유산보존회장, 저서로 《부석사 그리움은 풍경으로 흔들리고》(2004년), 《청량산 청량사》(2005년), 《영주의 선비정신》(2005년), 《봉화의 전통마을》(2006년) 《덕은 외롭지 않다》(2005년), 《회송헌 선생 실기》(2003)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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