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이사람]풍기인견의 산증인 풍기대광직물 윤정대 사장

해방 후 1946년, 당시 25세의 나이에 단신으로 십승지지를 찾아 월남해 풍기에 정착, 현재 까지 57년간 풍기 대광직물을 운영하고 있는 윤정대(86) 사장을 만나 보았다.

▲황해도 장연에서 경상도 풍기까지

헌칠한 키에 미남형 얼굴, 분명한 말씨에서 첫 만남에 호감을 느꼈다. 윤 사장은 황해도 장연군 개암포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작농주 아버지는 교육열이 높아 맏아들을 보통학교에 보내 졸업시키고 학당에서 한문을 익히면서 농업학교까지 진학시켰다.

해방이 되면서 북한은 정치적 변혁과 화폐, 토지개혁에 재산이 몰수되고 말았다. 윤 사장은 농업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고 국내 정세에 대해 판단이 빨랐던 60대 아버지는 월남 아니면 중국 유학을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당에서 정감록을 접한 일이 있는 윤 사장은 “난세에 몸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곳은 십승지지의 으뜸인 풍기 금계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며 “아버지로부터 풍기에 살고 있는 친구 분을 소개 받아 1946년 10월에 배와 기차를 번갈아 타고 몇 일만에 풍기에 도착해 얼마간 그분의 도움을 받아가며 생활했다”고 했다.

▲6. 25동란 그리고 인견과의 인연

처음 풍기에 도착, 직장을 구하러 찾아다니던 윤 사장은 당시 영암선(영주-철암) 건설공사를 맡은 아주토건의 위탁업체(문단재건)직원으로 1948년 4월에 채용됐다고 한다. 그러나 건설현장에서의 일은 6.25동란으로 인해 오래가지 않았다.

“소천면 임기에서 일할 때 6. 25 동란이 발발, 피신하려고 풍기로 왔는데 그때 단양에서 아군이 남으로 철수하고 있어 경남 밀양까지 피난을 갔죠. 그 후 9. 18 수복이 되고 다시 풍기로 올 수 있었습니다”

3년 간 철길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미군 공병대 군속으로 채용돼 도로, 교량, 막사공사 등에 일하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 후 풍기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금계리를 중심으로 몇 명(1인 2-6대)정도가 인조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금계리 용천동에 집을 세내어 인조공장(3대)을 시작했고 결혼을 31세에 했으니 만혼이었지요”

윤사장은 풍기에서 인견이 최초로 시작한 때를 1930년대쯤으로 기억했다. 그 당시 평안도 사람들이 이주 해 올 때 명주 짜던 기구(북, 바디)를 가지고 와서 인조공장을 차리면서 시작됐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풍기인조는 광복과 6.25 동란으로 물자가 귀한 때라 이윤이 좋아 너도나도 많이 시작했지요. 저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1960년도 말까지 20여대를 갖고 운영을 했고 계속 생산량이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인견 폭이 27 또는 36인치가 생산 되었는데 다량생산과 고품질이 요구되어 공장(대광직물)을 현 위치(800여평)로 옮기고 1970년대 초에 풍기에서는 최초로 ‘반자동 무늬 집기’를 고안해 폭 54인치의 신제품을 생산한 것이 풍기인견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지요. 현재는 물(워터), 바람(에어)집기가 등장하여 72-100인치까지 생산되며 1분에 700-900회전으로 크게 발전 했습니다”

풍기인견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2000년 초부터 웰빙 바람을 타고 수요가 점차 증가되면서 매년 인기가 상승되어 이제는 풍기특산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윤 사장의 인견 공장은 봉현 농공단지 내에 위치해 있다. 30여대의 기계가 가동 중이며 생산제품은 대구, 부산, 서울로 판매되고 일부는 집에서도 판매 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첫째 부모님 생각이 가장 많이 납니다. 비록 부모님의 권유로 이곳에 왔지만 부모, 동기 옆을 떠난 삶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아픔을 알 수 없지요” 윤 사장의 얼굴에 수심이 보이고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또 “사업이란 도전이기에 걱정과 근심의 연속입니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제품을 주고 어음을 받아 이것이 잘 해결되지 못해 수차에 걸쳐 부도위기에 처할 뻔 했을 때가 뼈가 아리도록 괴로웠다”고 했다.

▲보람된 일들

살면서 사경을 몇 번 넘기면서도 소생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지켜준 덕분으로 생각된다는 윤 사장은 “아내는 나의 인생행로에 나침반 같은 역할을 했다”며 “어려울 때마다 용기를 주었고 함께 고민했으며 5남매(아들 4, 딸 1)를 낳아 초등학교만 풍기에서 시키고 전부 서울로 보내 대학을 마칠 수 있게 내조했다”고 말했다.

윤사장의 집 실내 벽에는 특허청장에게 받은 의장특허(제198729호 직물지, 창작, 97. 5. 16)와 한자능력 1급 자격증(2003. 12. 한자능력검증연구회장)이 나란히 걸려있다. 고령임에도 윤 사장의 열정과 노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광복절이면 풍기를 길지라고 찾아온 실향민들이 부모, 동기 보고픈 절절한 마음에서 풍기 광복공원 평화통일 기원탑 앞에 모여 망향가를 부르는데 윤 사장은 이 평화통일 기원탑 건립(2003. 7)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탑 총 건립기금 1억2천만 중 윤 사장이 1천만을 쾌히 헌금한 독지가라고 평소 자주 만나면서 절친히 지낸다는 박삼용(84)씨가 알려준다. 박씨는 “윤 사장은 인품이 훌륭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이라며 “특히 자녀들을 잘 가르쳤고 사업도 성공시키면서 풍기 인견산업 발전에도 공헌한 분”이라고 말했다.

전우성 시민기자 lkj10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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